거창유지, 그들은 누구인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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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유지, 그들은 누구인가? # 2
  • 편집부
  • 승인 2015.08.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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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균 역사 칼럼 – ③ >

# 2. 대표적인 유지단체, 거창번영회 - 아직도 일제강점기 지역유지의 속성은 그대로 살아있다!


현재 거창사회에서는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11년 “거창법조타운유치위원회”는 지역민의 서명을 받아 “법조타운” 유치를 중앙의 관계기관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민들에게 “법조타운”에 대규모의 교도소가 포함된 사실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고, 나아가 그들이 제출한 지역민의 서명조차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일제강점기 유지단체에서 그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거창유지들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에 크게 놀라 조선인 지배계층에 대한 회유정책을 실시했는데, 거창에서는 이에 발맞추어 재력과 명망을 갖춘 인물들이 지역유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개최된 유지 강연회는 거창유지들의 활동 개시를 알려준다. 그해 9월 2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거창군의 유생과 유지들이 회동하여 거창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거창유지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최초의 유지단체는 제창회이다. 거창유지들은 1925년 8월 30일 거창면협의실에서 제창회 월례회를 개최하고 임시의장 구영서의 사회로 간이도서관 설치와 공설운동장 건설 등 2가지를 결의하였다.

이 사업을 맡은 위원은 주남재, 신익위, 이종호, 신용희, 김병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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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1월에 조직된 거창번영회는 일제강점기 거창의 대표적인 유지단체였다. 발기인들은 그해 여름부터 거창군 전체에 걸쳐 400여 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마침내 거창번영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거창번영회 창립총회는 11월 7일 11시 거창공립보통학교(현재 거창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총회는 회칙 통과, 임원 선거로 진행되어 오후 4시 30분에 끝났다. 그 후 축하연이 이어졌고 오후 6시에 산회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창립총회는 거창유지들의 독단적인 진행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총회 석상에서 일부 발기자들은 “독재적 분위기로 대중의 의사를 헌신짝처럼 취급하였다.” 그들이 예정된 의사와 일부 일본인의 주장만 따르려고 하자 “피와 땀을 짜서 입회금을 냈던 농촌의 회원”들이 이에 항의하였다.

그러자 유지들은 그들에게 “신사의 집회”이니 “신사적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일반회원의 의사를 묵살하였다. 이에 일반회원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소동 끝에 창립된 거창번영회는 결국 유지들과 일본인들의 단체가 되고 말았다.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간부들을 보면 거창번영회가 유지들의 단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총회에서는 회장에 이현보, 부회장에 신창재, 타께나가 칸고, 이사에 신용희, 우도노 미사오, 평의원에 이현보 외 몇 명, 고문에 김성한 외 8명, 그리고 간사 15명이 선출되었다. 잠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거창번영회 회장 이현보, 부회장 신창재, 이사 신용희는 일제강점기 거창을 대표하는 유지였다. 웅양 출신 이현보는 거창의 대지주로 재력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1928년 김성한 거창군수가 조합장으로 있었던 거창주조조합 부조합장이었고 곧 거창제주주식회사 사장이 되었다. 거창군수와 밀착된 기업인이었던 것이다. 거창읍 출신 신창재는 의사로서 남창의원 원장이었다.

그는 선출직으로 진출하여 거창면협의회원, 거창읍회원, 경상남도평의회원을 지냈다. 거창읍 출신 신용희는 거창면장, 거창금융조합장, 경상남도회원, 거창공립소학교(현재 거창초등학교)학부모회장, 거창번영회장을 두루 역임하여 “거창사회의 혜성”이라고 불렸던 인물이었다.

이로써 거창번영회는 지역의 재력가로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일제의 선출직 기관에 진출하거나 각종 관변단체, 지역단체의 대표를 맡았던 인물이 중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창에 거주하는 유력 일본인들도 지역유지였다.

거창번영회 부회장 타께나가는 일제말기까지 거창에서 주조회사 경영에 참여한 경제인이었다.

이처럼 거창번영회 간부들은 거창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거창의 재력가, 명망가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지역민에 대해 우월감을 지니면서 스스로 특권계층으로 행세하였다.

그 중심에는 거창번영회의 고문으로 추대된 김성한 거창군수가 있었다. 군수는 지역 권력자였으며, 지역유지들은 그 주위를 도는 위성과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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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유지들은 그들이 일제의 지배에 협력하는 민족반역자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역에서 명망성을 유지했을까?

이를 위해 그들이 내세운 것은 “거창의 발전”이었다. 거창번영회는 회의 목적으로 “유지인사들이 새로운 일, 새로운 기관을 열어가는 앞길을 개척하고 산적한 사업을 한시바삐 이루는 데 눈앞의 일을 가장 유리하게 해결하여 ‘거창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고 내걸었다.

이들이 말하는 지역발전은 대체로 시설의 유치, 토목공사의 실시를 조선총독부에 청원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거창유지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숨기면서 스스로 ‘거창발전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라는 여론을 창출해 나갔던 것이다.

이상에서 일제강점기 거창의 대표적인 유지단체인 거창번영회의 조직과 구성인물을 살펴보았거니와, 당시의 거창번영회와 근래의 ‘거창법조타운유치위원회’의 유사성은 놀랍기 짝이 없다.

지역 재력가ㆍ명망가로 구성, 권력과의 밀착, 지역민의 의견 무시, 비민주적 발상, 시설 유치 청원, 지역발전의 슬로건, 지역 대표자로 자임하는 것 등은 90여년의 세월 차이를 무색케 한다. 유치위원회는 거창번영회의 속성을 고스라니 물려받았다.

현재 거창의 갈등은 거창군수와 거창유지들의 시대착오적 사고방식과 퇴행적 행동양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창번영회창립총회(1924.11.15-vert
▲ 1926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지방논단’ - 거창번영회 창립총회에 대한 동아일보 거창지국 기자의 논단. 그는 글에서 거창유지들의 전횡을 비판하였다.




“각본에 따른 의사 진행과 일부 일본인의 의견만 반영한 것은

거창번영회의 본래의 뜻과 시대의 흐름에 그 얼마나 벗어난 것인가.

거창의 단체인 만큼 다수 주민을 차치한 조선인 대중의 의사를 더욱 존중하여야 하며

그 형편을 깊이 살펴야 참된 거창번영회의 사명이 이루어질 것이고

일부의 의사와 견해로는 도저히 대중에게 공평을 기하기가 어렵다.” ㅡ 논단 중







신용균-web
* 신용균 (문학박사, 거창고등학교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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