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얘들아, 나도 너희를 핵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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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얘들아, 나도 너희를 핵사랑해"
  • 편집부
  • 승인 2015.08.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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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자 (거창여자중학교 교사)

사춘기 여학생들은 감정표현이 솔직하다. 좋으면 좋은 대로 환하게 극찬을 아끼지 않고, 싫으면 싫다고 오만 인상을 구기면서 짜증을 낸다. 그래서 수업이나 조·종례시간에 아이들의 살아있는 표정에서 힘찬 응원가를 듣기도 하고, 기운이 쑥 빠져서 의지가 너덜너덜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쌤, 사랑해요.”

“○○쌤, 오늘 핵귀여워요.”

“○○쌤, 완죤 개멋있어요.”

복도를 걷다 보면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부장선생님께 이름 뒤에 달랑 ‘쌤’을 붙인 호칭을 부르고는 귀엽다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쓴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매우’라는 의미로 추측되는 ‘핵, 개’ 등의 접두어를 붙이고는 손으로는 연신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복도로 뛰어나와 옆 반 수업을 들어가시는 여선생님께 양껏 팔을 벌리고 다가와 안기기도 하고, 면전에서 대놓고 작년 선생님 수업이 더 재미있었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처음에는 이런 표현들이 낯설고 못마땅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나 생각들을 날것으로 던지는 표현들이 품위가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주 잔소리를 했다.

“세 번 생각하고 그래도 필요하다 싶으면 말해라.”

“어른들께는 예의를 지켜서 말씀드려야지.”

학급 담임을 맡은 반에 참 밝은 아이가 있다. 얼굴도 예쁘고 학급 일에도 적극적이며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다. 무슨 일이건 의욕적으로 도전하며 친구의 아픔에 가슴 아파할 줄도 아는 따뜻한 아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몇 번 주의를 시켰는데도 고치지 못하고 툭툭 던지는 말에 부아가 나서 공개적으로 그 아이의 말투를 지적했다.

“○○아, 너는 참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그 말투가 너의 좋은 이미지를 갉아먹고 있어. 그 버릇을 고친다면 훨씬 괜찮은 사람이 될 거야.”

공개적인 지적이 좀 심하다 싶으면서도 기분이 언짢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약이 될 거라 생각하며 신랄하게 꾸짖었다. 수업하는 내내 신경이 쓰이고 눈치가 보이는데 그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화장실에 갔다 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허락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수업을 했지만, 어리석은 내 처신에 또 화가 났다.

수업을 마치고 청소 지도를 하러 교실에 들렀더니 그 아이 짝꿍이 살며시 다가와

“선생님 아까 ○○이 운 것 화나거나 분해서 운 것 아니래요. 선생님께 감동해서 울었대요. 선생님께서 저를 나쁘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다 예쁜데 말버릇 한 가지만 고치면 된다고 해서 고마워서 울었대요.”

한다. 순간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얼른 교실을 나와 버렸다.

‘이렇게 마음이 예쁜 아이들이었구나. 짜증과 화가 섞인 꾸중도 고마운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구나. 감정을 묵히지 않고 싱싱하게 반응하는 탄력 속에 이렇게 큰 힘이 들어 있었구나.’

아이들의 순수한 감정표현을 재고, 자르고, 재단하는 옹졸한 선생 앞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솔직하다. 벚꽃처럼 환한 웃음을 머금고 ‘쌤, 사랑해요’를 외치는 아이들의 직설적인 애정 표현에 나도 점점 중독되어 가는 것 같다.

“얘들아, 나도 너희를 핵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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