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열 칼럼] 영화 ‘암살’과 ‘거창신원 민간인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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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 칼럼] 영화 ‘암살’과 ‘거창신원 민간인학살사건’
  • 편집부
  • 승인 2015.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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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천 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이 화제이다.

8.15 광복절과 맞물린 시기의 절묘함과 그동안 잊혀졌던, 아니 정규교육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일제시대의 무장 독립운동과 친일파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였기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나오자 경찰들이 환영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거창신원 민간인학살’사건이 떠올랐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식민지 잔재 청산이었다. 프랑스는 5년 남짓 독일의 지배를 받았지만 8만 명 내외의 민족 배신자들을 처단하였고, 민족 반역자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없이 아직도 조사, 재판, 처벌 중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미군정의 행정편의주의에 따라 잠적하였던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였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친일파 처단의 사회적 관심을 좌·우 갈등으로 바꾸고 친일파들은 좌파들을 척결하는 애국자로 둔갑하였다.

이어 이승만 정권은 통치의 주요 기반이었던 친일파들의 과오를 은폐하면서 좌파 척결의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친일파들을 활용하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군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광복군 출신의 간부들도 있었지만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관동군 출신과 일본 침략전쟁에 앞장선 일본군 출신들이 군대의 주를 이루었다.

(정부 수립이후 70년대까지 역대 육군 참모총장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군 출신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민간인학살사건의 주범들 대부분이 빨갱이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자기들의 과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였고, 동족 민간인 학살에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거창신원 민간인학살사건’이었다.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11사단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창설되었고 11사단장 최덕신은 광복군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최동오(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역임)의 월북으로 약화된 입지를 강화하고자 무리한 토벌를 강행하였고,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이 파견되자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은 일본군하사관출신으로 해방 이후부터 경남을 비롯한 남쪽 지역에서 민간인에게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워 학살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재판에 회부된 후 이승만의 사면에 의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서 오히려 출세이 길을 걸었다. (김종원은 사면 후 전북 경찰국장으로, 최덕신은 박정희 정권에서 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진상조사를 요구하였지만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유족들은 반국가사범으로 투옥되었고,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는 훼손되고 방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단죄되지 않은 친일파, 억울하게 희생되었지만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 사건, 그들을 비호하는 권력은 현재도 진행형이기에

(일제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대통령의 동생, 친일파였던 아버지를 자서전을 통해 애국자로 둔갑시키려는 집권여당의 대표, 영화 ‘암살’의 흥행이 불편하여 영화를 폄하하는 시론을 지면에 당당하게 싣는 친일파가 사주였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자 하는 분위기가 영화 ‘암살’의 흥행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성열 (거창함양고등학교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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