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 옛사람이 걸었던 길을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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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옛사람이 걸었던 길을 가고 싶다
  • 편집부
  • 승인 2015.09.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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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사동에 살던 박지원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를 비롯한 벗들과 1767년 무렵 ‘백탑시사’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 빈털터리 백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에 주눅들지 않았다. 백탑파의 힘은 우정이었다. 박제가의 ‘백탑에서 맺은 맑은 인연의 기록’이란 글에는 이들의 진한 우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1771년 봄, 박지원 이덕무 백동수 세 사람이 여행길에 올랐다. 박지원은 이 여행길에서 제비바위골을 찾아내고 그 지명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평안도 황주에서 이덕무와 헤어진 박지원과 백동수는 영변 약산과 묘향산을 오른 뒤 동해로 내려와 금강산과 설악산에 오르고, 충청도로 발길을 돌려 속리산에 들른 후 김천을 지나 거창에 들어섰다. 가조에서 합천 해인사까지는 30리 길이다.

가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이들은 용산, 어인, 말정촌을 지나 가야산 해인사에 도착했다.

1782년 봄, 이번에는 이덕무가 홀로 같은 길을 통해 해인사를 찾았다.

함양 사근도 찰방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때의 정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거창 읍내를 지나 저녁때에 가조창에 도착하니 여기는 옛 가조현으로 차츰 기와집이 있기 시작하였다. 5리쯤 갔는데 이곳의 이름은 용산으로 가야산에 들어가는 길 어귀이다. 동쪽 언덕에는 구일서재가 있으며 돌은 우뚝 서 있고 냇물은 흐르니 꽤 아늑한 기운이 있었다.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돌은 모두 마아석(편마암)이다. 나무꾼이 연달아 내려오는데 놀란 사슴이나 도망치는 노루같이 빠르다. 나무 끝에 저녁놀이 불그레한데 수십 집이 절벽에 매달려 있어서 말정촌이라 부른다.

20리쯤 가니 사람은 공중에서 말하고 말 울음소리는 구름 밖에서 들렸다. 비로소 고개 하나를 넘으니 지형이 낮아졌다.

젊은 날에 만난 이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 냈다. 이후 이들은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한 시대의 문화를 꽃피우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1789년 가을, 규장각에서 일하던 이덕무와 박제가, 장용영에서 군사를 교육하던 백동수 세 사람은 정조의 명을 받아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정리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1792년부터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박지원은 여가에 그리운 벗들을 안의로 초대하여 어울렸다. 이들의 우정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들이 걸었던 해인사 가는 길은 지금도 걷기에 아주 좋다. 대여섯 살 무렵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서 가야면에 있는 외갓집에 가던 기억이 있다. 20대를 전후하여 우혜리에 있는 고향집에서 해인사까지 걸어서 대여섯 번을 다녀왔다. 그런 추억이 있기에 박지원과 이덕무의 글을 만났을 때 무척 반가웠다.

추석이 멀지 않았다. 이번에 고향에 가면 걸어서 해인사를 다녀올 계획이다. 박지원과 백동수처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걸을 벗이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덕무처럼 홀로 걸어도 좋을 것 같다.







김영호-web
* 김 영 호 (한국 전통무예 연구가)

2001년부터 수원에 살며 한국의 전통무예와 병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조선의 협객 백동수> <수원 화성과 24반 무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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