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 특집" 거창의 여성독립운동사 (2)
상태바
"3·1 운동 100주년 특집" 거창의 여성독립운동사 (2)
  • 한들신문
  • 승인 2019.12.17 11: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여성교육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명덕여학교의 교사, 오른쪽 건물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명덕여학교의 교사, 오른쪽 건물

1920년대 거창지역 여성 운동은 여자 기독청년회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여자 기독청년회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여성 문제를 논의하고 여성을 계몽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교사, 언론인, 학생, 종교 단체 종사자 등 식자층이나 기독교인에 의해 설립되고 주도되었다. 점차 사회주의 사상이 풍미하면서 기존의 여자 청년회들은 청년연맹에 참여하였고,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활동을 추진하였다. 동시에 여성 운동이 갖는 독자성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성 운동이 여권 운동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혁과 여성 해방이라는 두 측면을 통일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당시 거창지역의 여성운동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과 여성교육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거창읍 교회를 중심으로 한 거창지역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기독청년회, 여자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거창기독청년회는 1922626일 총회를 개최하고 창립되었는데, 회장 심문태, 부회장 겸 총무 주남고, 서기 이상직, 회계 유주원, 종교 부장 고운서, 교육 부장 주남재, 운동 부장 이상직, 사교 부장 김학규, 실업 부장 신도출, 구제 부장 유주원이 선출되었다. 기독청년회는 그해 7월과 9월에 2번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712일 거창읍 교회에서 신희종의 인생의 급선무와 심문태의 기독교 청년이 수야라는 제목으로, 924일에는 김사문의 구각을 탈’ , 김영후의 시대 변천과 오인의 각오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1117일 황해도 수재민 돕기 연극 공연을 후원하였다. 19239월에는 보신강습소를 열어 소외 학생들에게 보통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사는 모두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하였고 심문태, 신양섭이 담당하였다.

192312월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운영하는 보신강습소의 경비를 후원하는 음악과 가극대회를 개최하여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1924324~29일까지는 조선어 강습회를 열었다. 강사는 한글 연구로 이름이 높은 조선어연구회의 이윤재였다. 그는 성음론, 품사론, 문장론, 논문 독해, 번역, 조선어학사, 표절어, 문자용법, 속기법을 강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2553일 기독청년회 간부 주남봉, 목사 김길창, 교인 유기도, 김영후가 경찰서에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757일에는 거창읍 동동의 송림에서 거창읍 교회 유치원과 남녀 학생 2백여 명이 참여하는 운동회를 개최하였고, 1928217일에는 가정주부의 문맹 타파를 목적으로 여자장학회를 설립하여 거창명덕여학교에서 조선어, 산술, 수술 등의 과목으로 회원을 모집하였다.

거창에는 호주 선교부가 설립한 교육기관인 명덕유치원(1913)과 명덕학교(1915)가 있었다. 스키너(Miss A. G. M. Skinner) 선교사는 1914 9월에 거창에 왔다. 스키너는 거창에서 교육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선교사였다. 그는 보통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나 19153월에 공포된 개정 사립학교규칙의 법적인 문제로 인해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교육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거창군 죽전리에 세워진 명덕(明德)강습소였다. 교육내용은 보통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학생은 주로 학령을 어긴 가난한 여성들이 많았다. 스키너 선교사는 19169월 마산으로 이거 하고 후임으로 스코트(S. M. Scott) 선교사가 거창에 왔고, 이때부터 그녀는 23년간(1916-1923) 거창에서 유치원, 보육원, 명덕강습소 등의 교육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녀는 거창주교’(The Bishop of Kuchang)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22년 당시 명덕여학교의 학생수는 100여 명에 달하였고, 성적도 양호하다는 평가가 있다. 1924년 명덕여학교에서는 유치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500명을 모아 강연회를 열어 기금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명덕유치원은 입학 학생의 저조와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1926년 거창읍 교회에서 인수하여 운영되었다.

1937년 일제는 거창읍 교회와 명덕여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고, 호주 선교사들은 철수하여 명덕여학교는 폐쇄 위기에 빠졌다. 1938년 거창교회가 명덕여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했는데, 기독교 장로회의 신사 참배 결정으로 19392월 학생들은 신사 참배를 행하였다.

당시 교사는 3명이었고, 학생은 6학급 15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9년 폐교령이 내려졌고 1941년까지는 명맥을 유지해오다 모든 선교사의 강제추방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명덕여학교는 비록 폐교가 되었지만,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은 거창지역 근대 학교의 모델이 되었고, 아동교육과 여성교육, 그리고 유치원 설립을 통해 조기 교육을 강조한 것은 새로운 교육운동이었다.

명덕여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해방 이후 거창교회 장로인 주경중이 거창고아원과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주경중은 독립운동가 주남선 목사의 장남으로 초대 거창문화원장(~8)을 역임했으며, 거창고등학교는 이후 전영창에게 인수되어 현재는 거창고등학교와 샛별초등학교 등 교육시설이 자리하여 기독교 전인교육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