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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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 한들신문
  • 승인 2020.01.2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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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
이 기고는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이 거창사건 당시 겪은 경험을 책으로 만든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입니다. 한들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로 옮기면서,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책에 사용된 표현까지 그대로 인용함을 알려드립니다.

▶ 차  례 ◀

국회와 4당 당사 앞에서(1)
국회와 4당 당사 앞에서(2)
야인 한동석☜
합동위령제☜
특별법 발의
3당 합당과 문민정부

 

야인(野人) 한동석(韓東錫)

우리가 왜 유족이 되었으며,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앞으로 명예회복을 위하여 입법, 행정, 사법부와도 수없는 난간을 헤쳐야 하는데, 그것은 죄 없는 양민을 학살해놓고 허위 날조 왜곡한 당시 육군 소령 한동석 때문이다. 이자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바른말을 하게 하려면 유족들은 단결하여 한곳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나는 다시 재경 유족을 찾아 나섰다. 문홍환, 문충현, 이철수, 문병언, 홍장희 우리 6명은 마포구 서교동 식당에서 모임을 갖고, 1회 만나기로 하고 회장은 이철수, 총무는 내가 맞아 유족을 증원하기로 했다. 서울 집회가 있고부터는 처음 만남과는 많이 달라졌다. 명년부터는 박산묘역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전체 합동위령제를 지내기로 했고, 문병현 회장 말이 부모, 형제자매의 억울한 누명 벗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하다에 공감하면서 신원, 부산, 서울 유족들의 국회와 김동영 의원 면담에 가교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야인이 된 살인자 한동석의 주거지를 알았는데, 그런 자가 나도 할 말이 있다라고 떠벌린다. 월간조선 9월호에 죽기 전에 언젠가는 내 손으로 직접 당시의 일들을 글로 써서 모든 걸 밝히고 가겠다. 솔직히 말하면 고인들이나 그 유족들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다. 그렇지만 용서를 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거창 양민 719명을 학살한 대대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론에 한말이다. 나는 편지로 그에게 물었다.

 

한동석 앞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내동마을에서 태어난 것이 죄가 되었는지 195129일 덕산리 청연마을 앞 눈이 덮인 논들에서 당시 10세가 되는 해 어머니(40), (14), 여동생(3)과 동민들을 당신이 쏘아죽일 때 시체 더미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다.

이제 나이 47세가 되어 37년 동안 너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복수나 책임을 따지는 차원을 떠나 몇 가지 묻고자 한다. 너는 (월간조선) 김재명 기자에게 나도 할 말이 있다.’라고 했다는데 유족대표와 만나 할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또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가?

최소한의 양심으로 그때 희생된 영령들에게 사죄할 생각은 없는가? 그리고 나같이 두 번 삶을 사는 생존자와 유족에게 사죄할 생각은 없는가?

19881222

유족 김 운 섭

 

안양시 안양3873-117 안양역 앞 본 백화점 건너편 국민은행 뒷길(한양슈퍼 3) 집 전화 0343-43-4279, 가게 전화 40-0155.

흉악무도한 자의 답이 오리라고는 기대 반이었는데, 답은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주소를 추적하였더니 서울로 옮겨 놓았다. 변경된 주소로 또 편지를 보냈다.

 

한동석 앞

작년 1222일에 글을 보낸 바 있는데, 그 글에 대한 회답이 궁금해서 재차 글을 보낸다. 이번에도 회답이 없을 경우 너는 우리 유족을 무시하고 지금도 힘이 주어지면 제2, 3의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같은 죄를 저지를 인물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나는 당시 10세였는데 한동석 육군 소령 네가 저지른 만행을 똑똑히 보고 체험했다. 지금까지는 군사독재에 눌려서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때 내가 겪은 처절했던 상황들을 폭로할 것이다.

너에게는 불행하게도 나 같은 생존자가 있어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어차피 그때 죽었을 몸, 지금까지 덤으로 살아온 인생, 살만큼 살아서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는데, 한 가지 그때 그 당시 학살자의 주범 한동석 너에게 해명이든 변명이든 잘한 짓인지그 답을 듣고 싶다.

1989년 김 운 섭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AID APT 12207

 

답은 받지 못했으나 주소를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면 중죄인이 충격을 받아 불안해하는 흔적이 보인다. 희생자가 주로 어린이, 여자, 노인 이이였는데 통비 분자 187명이었다는 그놈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게 한다면 하늘이 무심한 일이라, 나 또한 살아있는 한 지구 끝까지 추적하여 719 원혼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 줄 것이다.

 

합동위령제(合同慰靈祭)

사건 발생 38주기(198982910) 1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719 영위 합동위령제를 박산묘역 뒤편 예비군 훈련장에서 7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엄수(嚴修)되었다.

 

문병현 유족회장의 개제사 선언

초헌- 이일우 신원 면장

아헌- 백제현 신원파출소 소장

종헌- 김병영 신원초등학교 교장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영위(居昌 良民虐殺 犧生者 靈位)>앞에 제수를 진설하고 초헌-아헌-종헌 순으로 잔을 드렸다. 참석 유족들도 모두 예()를 올렸다. 합동위령제를 마치고 2부 추모식 행사는, 국민의례를 하고 김동영 의원의 추모사, 김대중 평민당 총재의 추모사는 추은석 씨가 대독하고 문병현 유족회장 인사말로 모든 행사는 끝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원혼들에게 기관단체장과 국회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위령제 및 추모 행사를 갖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특별법을 제정하여 명예회복을 하는데 매진(邁進) 하리라 다짐해본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재경 유족과 향우 30여 명을 태우고 서울 덕수궁 앞에서 06시에, 금성관광버스(이화성 기사)를 대절 내어 달려왔는데도 30분이 늦었다. 우리를 기다려 행사가 늦어져 추모객들에게 미안했다.

처음 치르는 큰 행사에 준비라든지 진행상 미숙한 점이 있었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고 위안을 삼고, 소고기국밥과 막걸리 몇 잔 걸치니 얼큰하게 취하여, 돌아오는 길에는 거창을 벗어나 김천을 경유, 경부고속도로에서는 여흥을 즐기며 서울까지의 시간이 짧기만 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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