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3 "백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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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3 "백학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1.2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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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jonga8280@hanmail.net)

백학마을은 적화 지역의 가장 끝에 있어 경북 김천시와 접경하고 있다. 마을 북쪽 산기슭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백학동이라 불렀다. 또한 마을의 형태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 족대처럼 생겼다 하여 족대설이 마을에서 전래한다. 마을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 물고기가 놀라 달아난다고 하여 예로부터 마을에서 풍물놀이를 금하였다. 정월대보름 풍물패가 마을로 들어오면 집마다 쌀을 거두어 주고 풍물을 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백학마을은 하성(霞城) 성터 아래 위치한다. 마을 뒤편으로 우뚝 솟은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이 이어진다. 지명 중에 ’, ‘’, ‘’, 자가 들어간 마을은 산성과 관련이 있다. ()을 의미하는 고어가 인데 의 한자어가 백()이다. 웅양면의 성북마을을 잣띠라고 부르는 것은 성기성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거열산성 아래 마리면 장백마을은 잣백이장백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백학마을도 산성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을까?

 

김천에서 거창으로 들어오는 첫 동네

거창에서 김천으로 가려면 배터재를 넘어야 한다. 이 재를 경계로 경상북도이다. 배터재에 술과 음식을 파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 마당은 곧장 김천으로 넘어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배터재 주막을 이렇게 말한다.

 

주막의 방은 경북이고, 정지(부엌)는 경남인기라. 세무서에서 술 조사(밀주 단속)가 나오마, 경남에서 나오마 술동이를 방으로 가져가고, 경북에서 나오마 정지로 옮기고 그랬다 카더라고.

 

사실 주막은 경남에 속했으나 도 경계에 있다 보니 이런 우스갯말이 회자한다. 일제강점기 주막은 양조장에서 술을 사 와서 팔아야 했지만, 더러 몰래 술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주막은 지금의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막집 주인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마을 표지석

마을 앞 표지석은 하성(霞城)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 성을 쌓으려고 치마로 돌을 싸서 가져오다가 아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돌을 내려놓았다는 전설이 마을에 전하여 온다. 3번 국도가 나기 전 배터 고개에 큰 돌이 우뚝 솟아 있었다. 멀리 오산마을이나 신촌마을에서 보면 돌은 반짝반짝 빛을 냈다고 한다. 만당에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 울타리에 있었다. 도로가 나면서 전설을 안고 있는 돌이 파손되거나 묻힐 위기에 놓였다. 동네 분들이 돌 밑에 나무를 깔아서 밀고 당겨서 마을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이것을 마을 표지석으로 사용하였다. 2019년 예전 표지석 앞에 새로운 마을 표지석을 세웠다.

 

배터재와 6·25

6·25 때 인민군이 내려와 배터 고개에 진을 쳤다. 인민군 열댓 명이 마을 어느 집 아래채에 머물러 동네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하성초등학교 운동장이나 마을에서 탄피 치기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적화에 인민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인들이 웅양에 들어왔다. 국군이 왔다는 것을 개화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에게 알리기 위해 누군가 한 청년에게 쪽지를 전하라고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은 개화마을로 향하다가 군인을 만났다. 그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분간도 못 하고 그 쪽지를 준 것이다. 쪽지를 본 군인은 그 자리에서 그를 총살하였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철수하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마을에 빨갱이가 많다면서 주민들을 조사해야 한다고 전부 앞뜰로 모이라고 하였다. 예서목(경북, 예서)마을 사람들도 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내려오니까 저쪽 도로에서 군인들이 총을 쏴 대기 시작했다. 주민들을 빨갱이로 오인하고 총을 쏴 댔다고 하였다.

마을역사공부
마을역사공부

 

할머니들의 마을 역사

지금의 할머니들은 1960년대에 시집을 왔다. 시집을 오니 마을에 물이 귀했다. 친정이 대덕이었던 할머니는 처녀 시절 친정 동네는 마을 한가운데로 물이 내려가고 바위가 냇가에 쫙 깔려있어 빨래하는 데 걱정이 없었다라고 했다. 시집와서 보니 이 동네는 빨래할 냇가도 없었다. 빨래하러 이웃 마을 이선묵(경북, 예서마을)까지 다녔다.

 

동네 빨래터는 뭐 하나 씻고 나와야 또 들어가서 씻고, 빨래를 다들 쭉 내려놓고 그랬는데요.”

물이 쨀쨀 내리 오고 그래, 요래 해 가지고(쪼그리고 앉아서) 씻고, 기다리고 있다가 씻고, 이래 했어요.”

 

대형관정을 파서 집마다 물이 나오니까 그때부터 빨래하러 가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시집와서 물지게를 지고, 물동이로 물을 나르고, 남의 동네까지 빨래하러 가고, 물 전쟁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수도가 들어오고 세탁기를 집마다 들여놓으면서 할머니들의 삶은 달라졌을까?

 

마을의 이모저모

1978년 백학마을은 취락구조 개선사업을 하였다. 당시 취락구조 개선사업에는 갑과 을로 구분하였다. 갑은 새로 집을 짓는 마을로 적화에서는 아주마을이 해당하였다. 백학은 을에 해당하여 정부 보조금 15평 기준으로 136만 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마을에는 해마다 부산 동아대에서 농촌 봉사활동을 온다. 해마다 반가운 젊은 일꾼들이 온다. 부산 동아대 농촌 봉사활동 팀이다. 이들은 2005년부터 마을과 인연을 맺어 온 동아대 학생들이 마을에서는 반갑고 고마운 손님이자 일꾼이다. 여름방학이나 봄·가을 농사철에 온 대학생들은 부족한 일손을 거들었다. 혹 농활을 왔다가 이곳으로 귀농한 젊은이가 있는지 물었다. 마을 분들은 올해로 14년째인데 아직 그런 젊은이를 붙들지 못했다며 웃었다.

 

마을 역사는 지금 여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지역의 현대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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