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4 "한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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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4 "한기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2.2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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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jonga8280@hanmail.net)
한기마을 겨울 풍경
한기마을 겨울 풍경

한기마을은 경남, 경북, 전북 3도의 경계에 있는 마을이다. 오른쪽이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곳이며, 경북 감주마을로 넘어가던 고개 아래(멀리 보이는 집들)에 귀농한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마을 이름은 대현리(大峴里)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적화면이 웅양면으로 통합되면서 한기리로 한기로 바뀌었다. 대현은 큰 고개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기마을에서 고개를 넘으면 경북인데 그 아래 4개의 감주마을이 있다. 감주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서 적화로 오갔다. 한기마을에서는 이 고개를 감줏재라 불렀고, 감주에서는 큰 재라 불렀다. 한기는 한터라 부르는데 이는 너른 들녘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오뭇들 가을

 

마을 앞 너른 들은 일찍이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뭇들은 해발 500

미터에 있는 적화 분지이다.

 

옛날에는 고디(다슬기)가 많아 모 심을라꼬 물 잡아 놓으마 한 바가지씩 주워오곤 했어.”

논 귀퉁이마다 웅덩이가 있어 미꾸라지도 많았어. 거창읍에서도 잡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왔어. 그 삼들 오마, 웅덩에서 잡은 미꾸라지가 양철통에 가득이라.”

또 거머리는 얼마나 많았노. 모 심다 보마 다리에 달라붙어 피가 벌겋게 났지. 인자 고디가 어디 있노. 농약을 치 싸니까 거머리도 그때만큼 없어.”

 

가난했던 지난날, 마을 사람들은 오뭇들 논을 가지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기도 하였다. 오뭇들 논 주인은 한터 마을뿐만 아니라 왕암, 개화, 도계에 있는 경북 문의와 대동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는 경북 사람이 농사를 지어 경남 쌀을 가져간다고 하여 쌀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한 적도 있어 군수끼리 협상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골짜기 논은 농사지을 일손이 없어 묵히지만, 오뭇들은 경지정리를 하여 대규모로 농사짓기에도 좋아 여전히 인기가 있다. 연로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오뭇들 논을 임대하고 있다.

 

·열 정려문이 있는 마을

마을 앞에는 효자·열녀 정려문과 공적비가 서 있다. 마을 분들은 한 집안에서 열녀가 나고 효자가 나는 것은 드문데 우리 마을에는 효·열 정려가 함께 세워져 있다라고 자랑을 하였다. 공적비는 마을 길을 포장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재일교포 이우영 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열녀비는 요즘 시각에서 여성의 삶을 옥죄는 사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시대의 가르침에 순응했던 한 여인의 삶을 반추하게 하였다. 열녀비 옆 큰 나무 아래에는 소망을 비는 누군가가 제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었다.

열녀 정려문
열녀 정려문
효자 정려문
효자 정려문

 

 

 

 

 

 

일제강점기 한터마을 사금 채취

한기와 진마루마을 사이에 야트막한 산을 개금산이라 부르고, 산 아래 밭을 개금밭이라 부른다. 개금산은 산이 전부 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마을 앞(정려문이 있는 곳)에 금을 채취하는 일본인 사장이 살고 있었다. 보통 금을 채굴하는 방식은 산에 굴을 뚫어 암석에서 금을 채취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땅을 사람 키보다 더 깊이 파서 모래에 섞인 사금을 기구로 일어서 금을 채취하였다. 넓적한 나무 함배기(함지박) 같은 기구에 금이 섞인 모래를 도랑물에 대고 살살 흔들어 금을 일었다. 마을 남자들 대부분은 땅을 파는 잡일을 하였고 사장에게 신임을 얻은 기술자에게만 금을 이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동네 꼬맹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가 일하는 사금 채취 현장으로 놀러 가곤 하였다. 75년이 지난 지금의 어르신들은 일본인 사장이 우리한테 과자를 주곤 했고, 사장은 훈도 시(일본 남성이 입는 전통 속옷)만 입고 왔다 갔다 했다라고 기억했다.

 

한터 못과 마을 사람들

너른 들판이 있던 이곳은 오래전부터 못이 있었다. 공식적인 문건에는 1941년에 한터 못을 준공했다고 돼 있으나 그 이전부터 큰 못과 작은 못이 있었다. 1960년대 다시 한터 못 보강 공사가 있었다. 공사를 할 때 물이 출렁거려 흙이 파이는 것을 막기 위해 못 바닥에 돌을 넣어야 했다. 돌을 구하지 못해 하성(霞城) 성터에서 돌을 가져와 넣었다. 당시 성()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그저 버려진 성터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터 못에 사람이 빠지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동네에 살던 정판상 씨는 한터 못에 빠진 사람을 여럿 구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못에는 두꺼비가 많았다. 한터 못에서 알을 낳고 부화한 두꺼비가 적화 전체로 퍼져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창 누에를 먹일 때, 두꺼비는 잠밥 위 누에를 잡아먹었다. 두꺼비를 잡아 마을 앞 도랑에 갖다 놓으면 집으로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그 많던 두꺼비들은 농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더 볼 수 없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한터 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978년에는 비가 오지 않아 못 바닥까지 바싹 말랐다. 군수와 면장이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마른 못 안에서 씨름판을 벌였다.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고 나니 고마 비가 왔다고 기억하였다.

한터 못
한터 못

 

노동요, 망깨소리

한터 못 보강 공사를 할 때 땅을 다지면서 걸머리(하곡)에 사는 임출이 양반이 망깨소리 앞소리를 잘했다. 망깨소리는 땅을 다지거나 말뚝을 박으면서 부르는 노동요이다. 한사람이 앞소리를 하면 뒤이어 함께 뒷소리로 호흡을 맞춰 망깨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땅을 다지는 것이다. 망깨는 둥근 나무에 못을 박아 서너 군데로 줄을 맨다. 나무의 높이는 1m 정도인데 클수록 압력이 세다. 혼자 발로 밟아 땅을 다지는 것보다 여럿이 망깨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땅을 다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앞소리를 하는 사람은 처가 이야기, 마누라 이야기, 아들 이야기 등 다양한 서사를 구사했다고 한다.

 

망깨 소리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망깨 소리 사진, 국립무형유산원

 

천 냥짜리 망깨는 공중에 놀고,

~~~, 망깨야,

00짜리 마누라는 방에서 논다.

~~~, 망깨야.

(한터에서 불렀던 망깨소리 일부분)

 

한참 앞소리 뒷소리를 넣으며 일을 하다 목이 컬컬하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힘든 일이지만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일할 때는 고단할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제 길을 닦을 때 바닥을 다지는 기계가 있어 망깨가 필요하지 않다. 망깨소리는 어르신들의 젊은 날의 아련한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신현억(88, 하성마을 역사연구회 전 회장) 씨는 망깨소리를 역사연구회에서 재현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망깨소리’, ‘바람 올리기’, ‘객구 물리기등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행해졌던 것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배어있다.

 

마을 역사는 소외당하고 외면해온 서민들의 문화를 재발견하고 그것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태어난 적화 땅에서 농사꾼이 되어 꽃 피고 눈이 내리기를 60여 년, 출세를 하지도 못했고, 재물을 모으지도 못했지만 이들이 모여 나누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적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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