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님과 함께 하는 치유와 성장 이야기]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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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님과 함께 하는 치유와 성장 이야기]눈치
  • 한들신문
  • 승인 2020.03.2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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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주(첫):교육학 박사

이번 달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첫님과 함께 하는 치유와 성장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조윤주() 선생님은 교육학 박사(상담심리전공초등학교 교사이면서 상담전문가입니다. 치유와 성장 공간 더 어스(THE EARTH)에서 치유작업과 상담 활동, ᄒᆞᆫ철학을 바탕으로 한 ᄒᆞᆫ상담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이(J)”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나타났다. 담임선생님 옆에 나란히 앉은 아이는 어깨가 한 움큼 쪼그라들어 위축된 심정을 몸으로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학교에서 야간자습을 하는 어느 날, 선생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학교 밖을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단다. 야자 시간이 끝나는 시각에 맞추어 교실에 있는 가방을 챙기러 학교로 다시 들어갔는데 감독 선생님께 들켜버린 것이다. 학교에서는 이 사태를 일벌백계의 모범으로 삼으려는 듯 엄한 태도를 보였고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이 책임을 지고 반드시 갱생시켜 새사람을 만들겠노라고 약속을 한 뒤에 상담을 받으러 온 거였다.

선생님을 따라 상담받으러 온 모습을 보니 그다지 막 나가는 거친 아이는 아닌 듯했다. “제이(J)”는 낯선 곳이라 긴장도 되고, 선생님과 함께 있는 자리라 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듯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담임선생님이 한숨을 푹 쉰다. 그 한숨 소리에 담임선생님 얼굴을 한번 휙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엄청 미안한갑지…….”

……. 너무 면목 없고……. 또 죄송하고.”

착하네. 미안한 줄도 알고.

학생이 술 마시면 안 되는 건데…….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

억울한 마음은 안 들더나?”

억울하다기보다는 좀 후회가 …….”

어떤 점이?”

괜히 책가방 때문에 학교 들어간 거요.”

어떤 거창한 성찰을 기대했었던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나온 대답에 담임선생님과 나는 동시에 웃었다. 다소 엉뚱하기는 해도 착한 구석도 보인다.

그 녀석 크게 될 인물이네.”

웃음이 잔뜩 묻어있는 내 말에 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애지간한 뱃심 가지고 야자 시간에 담 넘을 수 있나, 그것도 술을 마시러 간다고. 너 정도로 되니까 그렇게 배포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거지…….”

월담 사건 이후로 여기저기에서 너 잘못했어!(YOU ARE WRONG)'이라는 온갖 비난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아이의 행동이 아니라, 아이가 가지고 있는 품성에 초점을 맞추어 제 됨됨이를 알아봐 주니 어색해하면서도 입가에는 연한 미소가 번진다.

제이(J)”, 내 생각 한번 들어볼래? 이야기해도 괜찮겠나? 나는 제이(J)”가 엄청나게 큰 잘못을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좀 아쉬운 점은 네가 좀 눈치가 없었던 거 같다.”

눈치는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이다. 눈치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지성과 외부에 대한 수용 능력, 그리고 자기조절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에 가장 적합한 판단을 내리고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제이(J)”는 그날 자기 행동의 눈치 없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잊지 않고 가방을 챙겨가고자 하는 의도는 기특했으나, 술 냄새를 풍기며 교실 문을 열 때 어떤 친구들에게는 민폐가 되기도 하고, 감독 선생님께 걸릴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너는 소신도 있고, 한다면 하는 스타일 같은데 여기에 눈치까지 있으면 어떨 것 같노?”

, 선생님. 그야……. 으흐흐흐.”

아하! 알아듣는 모양이다. 현타(현실 자각 타임)의 순간이다. 아이는 총명한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 더 가벼워진 듯 어깨를 털고 허리를 세웠다.

확실히 해 두고 싶어졌다. 이번 일로 제일 많이 염려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였다. 지금 그분들께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으니 옆에 계신 담임선생님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자기에 대해 안심하는 거라고 말한다. 기특했다. 상담실로 들어올 때의 그 쪼그라들던 마음이 아니었다. 본래 갖고 있던 제 마음 그릇의 크기를 되찾고 자신에게 담담하고 자신으로 인해 상심했을 주변 사람들을 챙길 수 있는 친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선생님. 진짜 죄송해요. 속상하게 해 드려서.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눈치 없는 짓 안 하겠습니다. 정말이에요. 야자도 열심히 할게요.”

담임선생님도 제발! 하며 꿀밤 주는 흉내를 내자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그 후 2년이 지나서 그때 오신 선생님으로부터 제이(J)”가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교에 입학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봄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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