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5 "하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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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5 "하곡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3.2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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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
하곡마을 겨울
하곡마을 겨울

3번 국도를 따라 옛 하성초등학교 동쪽 편 마을이 하곡이다. 마을은 봉우산 아래 양지땀과 건너땀을 중심으로 섬땀, 바리방골, 왕계터에 형성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하곡의 옛 이름은 거말흘이다. 흘이 마흘을 칭하는 접미사로 보통 사용되었으므로 거말(巨末)흘은 거창의 끝자락에 있는 큰 마을이라고 한다. 거말흘은 걸머리로 불리었으며 언제부터인가 하곡으로 불리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곡이 적화에서 가장 먼저 생긴 동네일 것이라고 한다. 한국족보편찬위원을 지낸 이교상(85) 씨는 조선 개국과 함께 두문동에서 거창 장씨가 거창군 웅양면 한현촌(汗峴村)에 자리 잡았다고 나오는데 정확한 마을 지명이 나오지는 않으나 웅양면 한현촌이 하곡일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마을과 봉우산
마을과 봉우산

봉우산과 하곡마을

마을 뒤 오른편에 봉우산(거말흘산)이 버티고 있다. 조선 시대 봉수를 올렸던 곳으로 거말흘산 봉수대가 문헌에 있다. 봉수를 올리던 역할이 끝난 봉우산은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했다.

마을에 바우어른’(이보은 씨)은 이곳에서 담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농사를 지을 땅이 없어 봉우산 꼭대기에서 파전을 일구었다. 동네에서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 내외가 담배를 뜯어 지게로 져 날랐다고 한다.

최석길 씨(79, 하성마을 역사연구회장) 아버지(최봉춘: 崔逢春)는 해방되고 일본에서 나와서 이곳에서 숯을 구웠다. 오산 동네 김진규 씨가 목탄을 이용한 발동기로 방아를 찧었는데, 목탄 발동기의 원료인 숯을 최석길 씨 부친이 공급했다고 한다. 큰 골짜기에 숯구디가 있었고, 옆에 밭을 만들어 서숙()도 갈았다고 한다. 도랑가에 송아지딸’(굵은 산딸기)이 많아 오가며 따먹고 집에 갈 때 동생을 주려고 가져가기도 하였다고 회상했다.

 

목너미재와 마을 사람들

-목너미재를 넘어 우두령으로-

우두령으로 도로가 생겨 적하 주민들이 자갈 부역하거나 풀이나 나무하러 어인마을 뒷산까지 다니던 길이기도 했다. 풀이나 나무하러 남의 동네까지 가야 하므로 어인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가끔 술대접도 하였다.

목너미재를 넘으면 우두령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주인을 사람들은 호래이 할매라고 불렀다. 나무를 하거나 풀을 베어 오면 주막에서 잠깐 쉬면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할머니 성품이 워낙 억세고 무서워서 아무도 술을 마시고 돈을 떼어먹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120살쯤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목넘이재 정자나무와 들돌 이야기 -

목넘이재를 경계로 경북과 경남으로 나뉜다. 목넘이재 가는 길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다. 소 먹이러 간 아이들에게는 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워낙 큰 데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속이 비어가고 있었다. 소 꼴을 베며 놀던 아이들이 나무 속 빈 곳에 불을 질러 말라 죽었다. 정자나무 아래 큰 돌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들돌이라 불렀다. 동네 사람들이 나무하러 가거나 풀을 베러 가면서 힘자랑용으로 사용했다. 들돌을 어디까지 들어 올리는지가 볼거리였다. 마을에 왕 씨 어른’(왕정용 씨)이란 분이 있었다. 덩치는 조그마했으나 힘이 장사였다. 그는 지게를 벗지도 않고 그 돌을 들어 어깨너머로 넘겼다.

세월은 흘러 목넘이재 아래 들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들돌은 땅속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거말흘언 저수지 상상도
거말흘언 저수지 상상도

거말흘언(저수지)
 거창부 읍지에 거말흘언은 거창부 동북쪽으로 7리에 있다. 동서로 길이가 230척(67m)이고, 남북으로 너비가 95척(9m)이다. 둘레가 317척(96m쯤)이고, 수심이 넉 자(120cm)라고 적혀 있다. 
 마을 사람들은 거말흘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88년 경지정리를 하고 길을 내면서 저수지를 메웠다고 한다. 크기는 약 1마지기(200평) 정도였다. 겨울에 이곳에 얼음이 얼면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놀았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근거하여 이곳이 거말흘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연인이었던 시절, 동네 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자연인이었던 시절, 동네 분들과 함께 찍은 사진

대통령이 다녀간 마을
 마을회관에 문재인 대통령과 동네 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한 어르신이 “우리 마을은 대통령이 다녀간 마을”이라 자랑을 하셨다. 이 동네는 유독 귀농인이 많다. 대표적인 귀농인이 문성현 씨다. 문성현 씨는 하곡마을에서 10년째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지역민과 잘 소통하며 지역 노인회의 사천 방위산업체와 포항제철소 견학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하성 단노을 생활문화센터에서 풍물패 상쇠를 맡고 있었는데 노사정위원장으로 잠시 하곡마을을 떠나 있다. 단노을에서는 “청와대는 우리 상쇠 내놔라!” 고 축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마을역사공부(2019년 2월 10일)
마을역사공부(2019년 2월 10일)

하곡마을 역사 공부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시간
-‘남의 동네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사람’도 있었다.-
 마을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은 늘 있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동네 전체가 나서서 ‘덕석말이’를 하는가 하면 대부분 사람은 앙갚음이 두려워 그냥 참고 넘어갔다. 
 오칠성(가명)씨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 운동회 즈음인데, 동네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는다고 돼지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그때 오칠성 씨가 찾아왔다. 도축 허가도 없이 잡는 것은 불법이라며 경찰에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잡은 돼지를 그에게 주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나무 한 짐을 갖다 달라고 해서 줬는데 갚지 않고, 고추 세 근을 갖다 주면 돈을 준다기에 마지 못해 갖다 주었더니 그마저 떼어먹었다고 한다. 다른 분은 금광마을에 가서 염소를 한 마리 사 와서 키우고 있었다. 주인이 산에 가면 마치 강아지처럼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녀서 아주 귀하게 여겼는데 뺏겼다고 한다. 보복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주긴 주었는데 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목넘이재
마을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목넘이재

 역사 공부에서 마을 분들은 동네에서 일어난 잊지 못할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껏 가슴 속에 쌓인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살아온 날들을 공유하였다. 마을 역사는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 보고 마을의 미래를 상상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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