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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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 한들신문
  • 승인 2020.04.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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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림초 교사 박동명

쉬는 시간 종 치기 1분 전 수행평가 종이를 거둘 때가 되었다. 아이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고 어디선가는 다다닥 빠른 속도로 나무 책상 위에 글씨를 쓰는 소리가 들린다.

, 이제 맨 뒤 사람이 거둬서 와요.”

갑자기 한 아이가 나에게 소리쳤다.

선생님 너무 애쓰지 마세요. 난 어차피 엄마 유전자를 닮아 인생이 노력 요함이에요. 그냥 그렇게 살래요.”

거둔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시험지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가인이를 부르니 아이가 먼저 선제 방어를 했다. 꽉 다문 입술 밑에도, 단발머리를 넘긴 귀에도 피어싱을 달고 있는 가인이는 당당한 척을 하지만 사실은 조금 떨고 있었다.

아이가 미안해하거나 그럴싸한 변명을 댈 줄 걸 기대했었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당황스러웠다. 이제 겨우 열세 살 아이가 마치 인생 다 산 이처럼 말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인이는 내 수업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었구나. 아이의 과거가 어떠했기에, 지금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어떤 문제이기에, 아이를 이렇게 낮은 자존감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답답하고도 속상했다.

수업을 마치고 상담실로 함께 갈 때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가인이는 무슨 맛 사탕을 줄 건지를 물었다. 나는 심각하다가 웃음이 났다. 그래, 너에게 지구의 공전과 계절의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매일 꽉 찬 여섯 시간씩이나 학교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쉬는 시간이 되면 시든 꽃에 물을 준 것처럼 다시 살아나는 가인이. 그래,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버티고 견디며 네가 웃을 수 있는 그 시간을 위해 기다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상담일지를 적다가 난 지난여름 여행한 샨르우르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터키 동부 시리아와의 국경, 메소포타미아가 시작되는 곳, 아브라함(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믿음의 조상이라 불림)이 우상을 깎아 팔던 하란이 있는 곳 샨르우르파. 나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보기 위해 고도 750의 동산 꼭대기에 올랐다. 그곳은 너무도 뜨겁고 메말라 이렇게 넓은 땅이 있어도 잡초조차도 자라지 않는 땅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푸른 숲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올리브농원이었다. 올리브나무는 가지가 휘청일 정도로 열매를 달고 있었다. 실로 놀라웠다. 아무리 건조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올리브라지만 어디에서 물을 댈까 궁금했다. 나는 함께 간 택시기사에게 질문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이 땅에 누가 물을 줬을까요?”

매일 하늘에서 이슬이 내립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해가 떨어지면 내리는 대지의 이슬이었다. 해가 뜨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이슬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구나. 이 보잘것없는 것이 누구에게는 희망이요 유일한 젖줄이라니. 그래, 어디서든 절망이란 없다. 누구에게든 같이 은혜는 내리는 것이다. 다만 느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뿐이다.

그래도, 올리브 씨앗이 돌밭을 뚫고 뿌리를 내리며 얼마나 큰 상처를 입고 참고 견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가인이에게도 이슬이 내리길 기도했다. 그리고 가인이가 견뎌내기를 기도했다. 힘들고 어렵지만, 사막의 올리브나무처럼 그렇게 살아 내는 삶이길, 척박하고 거친 땅을 사랑하고 견디며 결국 값진 열매를 만들어 내길 기도했다.

가인아, 무슨 맛 사탕 줄까? 선생님은 언제나 너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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