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6 "신오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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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6 "신오산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4.2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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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jonga8280@hanmail.net)

신오산은 오산마을에서 약 100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마을 생성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오산마을보다 늦게 형성된 마을로 짐작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오산마을에 불이 나서(시기는 정확히 알지 못함) 신오산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새로운 동네라 하여 새땀으로 불렀으나 현재 마을 정식 명칭은 신오산이다.

마을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는 김해 김씨는 5대째 살고 있다. 대동(경북 김천시 지례면)에서 새 동네에 새집을 짓고 들어왔다고 하여 새땀이라 불렀다고 한다. 봉화 금씨, 청송 김씨, 경주 최씨 등이 어울려 살아왔다.

 

경덕재와 신오산 마을

마을 사람들은 신오산이 경덕재가 들어오기 전부터 여러 집이 살았고, 마을 안에 경덕재가 있는데 경덕재가 있는 마을로 불린다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웅양면 산포마을에 살던 이현보 씨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금광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으며 사당을 갖춘 부농 주택을 지었다. 사람들은 이 집을 경덕재로 불렀다. 경덕재가 마을에 터를 잡자 마을은 경덕재가 중심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경덕재가 들어서기 전에는 동네가 크지는 않았지만, 머슴들만 모여도 9명이 될 정도로 동네가 잘 살았다고 들었다라고 했다. 그 이후 신오산 주변 땅은 거의 전부경덕재 소유였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경덕재 땅을 경작했다.

하종한 교수(거창대)경덕재는 재()로 이름이 붙여졌지만 처음 건립자의 의도가 별장형 주택을 염두에 두고 건립한 건축물이다. 이화장 등 건물 내에서 생활하되 별장을 의미하는 건축물의 사례가 많으므로 경덕장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하였다.

경덕재 안채 : 불타기 전 모습
경덕재 안채 : 불타기 전 모습
불에 탄 경덕재 안채(왼쪽 앞)와 남아있는 사당과 협문
불에 탄 경덕재 안채(왼쪽 앞)와 남아있는 사당과 협문

경덕재

마을 뒤편에 자리한 경덕재는 1915년에 건립되었다. 경덕재의 원래 이름은 경덕장으로 안채, 대문채, 사당채, 및 부속 채가 여러 동이 있었다. 이것은 한··중국 건축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외형을 나타내는 일제강점기 부농의 주택이다. 경덕재는 근대 한옥에서 볼 수 없는 건축양식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등록문화제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경덕재는 사랑채가 따로 없고 남녀 주거 공간의 구분이 없다. 건물과 건물 사이, 방과 방 사이를 오가는 동선(動線)을 최소한으로 줄여 유교적인 관습보다 실용성을 강조한 보기 드문 형태의 근대 한옥이다.

안채를 돌아 계단을 올라가면 사당이다. 사당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이현보 씨가 묘소 아래 지었다. 경덕재는 재실과 주택이 혼용된 독특한 형태의 한옥이다. 경덕재는 2014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소유주가 문화재 취소를 신청하여 문화재청은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했음을 고시하였다. 비록 본채는 불에 탔지만 남아있는 대문채, 사당, 협문 등의 건축물은 건축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연못과 벚나무 길

경덕재 앞에는 관리인 집이 있었다. 대문 앞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가면 학고하당비석이 있는데 예전에 그 아래 연못이 2개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인공적으로 휘돌려 못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연못에는 정자도 있었다고 한다. 한 마을 분은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한영 씨가 일본식 정원을 본떠 만들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경덕재 대문부터 연못까지 이어진 벚나무는 정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왕벚꽃과 겹벚꽃이 활짝 피면 멀리 군암마을에서도 벚꽃 무더기가 보일 정도로 형언할 수 없이 예뻤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경덕재 벚꽃이 거창 곰실 벚꽃보다 더 화려하고 좋았다고 회상하였다. 벚꽃이 흐드러질 무렵이면 하성초등학교 학생들은 이곳으로 봄 소풍을 왔었다. 40년 전 벚나무는 베어지고 연못은 메워져 논이 되었다.

학고하당(鶴皐霞塘) 비석
학고하당(鶴皐霞塘) 비석

학고하당(鶴皐霞塘)

연못 옆 낮은 언덕 아래 학고하당’(鶴皐霞塘)이라는 비석이 있다. 학고하당은 학이 언덕에 앉아서 노을이 비치는 연못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백학마을의 지명 유래가 학과 관련한 전설이 있고, 신오산이 학의 날개에 해당한다는 풍수지리설에 대해 이한영 씨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상출 씨는 학고하당에서 노을 하()가 처음 등장하는데 적화(赤火)가 적하(赤霞)에서, 또다시 하성(霞城)으로 바뀌었고, 걸머리가 노을 하자를 쓰면서 하곡(霞谷)마을로 바뀌었고, 이런 것으로 봐서 학고하당(鶴皐霞塘)의 노을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하였다.

적화(赤化)국민학교는 1950년에 하성(霞城)국민학교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적화(赤化)를 적하(赤霞, 붉은 노을)로 불렀다. 1968년 리동단위협동조합이 하성단위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지명의 어원이 학고하당(鶴皐霞塘)과 관련된 것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신오산 동청

일제강점기 마을에 동청이 있었다. 이후 경덕재 소유가 되었다. 하성학교 1회 학생들은 학교 건물을 짓기 전에는 이 동청에서 공부하였다. 동청 건물 앞쪽의 창문만 가려서 교실로 사용하였는데 웅양 제2심상소학교로 등록된 곳이다. (한기리 520-1번지)

 

6·25와 마을

신오산마을도 6·25를 비켜 갈 수 없었다. 동네 뒤 대밭에 큰 굴이 있었다. “저녁 먹고 나서 거기로 피난을 갔었고, 동네 사람들과 재실 사람들이 함께 갔을 것이라고 했다. 경덕재 옆에는 2층으로 지어진 창고가 있었는데 6·25 때 폭격을 피하고자 뜯어냈다고 한다.

마을 분은 항개 양반(이한영 씨를 동네에서 부른 택호) 재실과 또 다른 한 집을 인민군본부로 사용했는데 인민군들이 바글바글했다라며 그때를 회상하였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인민군이 밥해달라고 해서 밥해 주었는데, “지주라고 해서 사람을 해치고 그러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다.

00 씨는 동네에 초상이 나서 부고를 새끼줄에 꿰어 지례면 하람으로 가다가 미군에게 총질을 당해 바로 즉사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인민군 연락병으로 오인을 해서였다고 한다.

동청 자리 (한기리 520-1번지)-웅양 제2심상소학교가 등록된 곳
동청 자리 (한기리 520-1번지)-웅양 제2심상소학교가 등록된 곳

경덕재와 동네 이야기

일찍이 마을에 정착한 몇 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덕재 토지에 농사를 지었고, 재실 소유의 땅은 딴 동네에도 많았다. 가을이면 도지를 실은 소달구지가 무진장 왔다 갔다 해서 삽짝(골목)이 비잡았다고 하였다. 경덕재에서는 도조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사례로 왜지름(석유) 한 병씩을 주었다고 한다.

마을 역사에서 경덕재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경덕재 우물, 도조를 냈던 이야기며 도조 바리, 소를 맬 때 소 매는 값을 냈던 이야기, 농지개혁 등 마을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경덕재를 중심으로 이어졌다. 경덕재 주인 이현보 씨는 하성학교를 지을 때 토지를 희사하였다.

경덕재와 마을 이야기를 들으며 박경리의 <토지> 최참판댁이 떠올랐다. 최참판댁은 마을 대소사에 아낌없이 지원했으며, 흉작일 때는 곡간을 열어 마을에 풀었다. 그래서 흉년이 들어도 몇 리 안에는 굶어 죽은 자가 없었다. 소설 속 이야기와 실제의 삶은 다를 수 있지만, 최참판댁은 부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오늘날 그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한다. 사회적 부와 신분을 가진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옛날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부자들은 도적이 들거나 난이 일어나도 동네 사람들이 그 부잣집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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