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닥방’에 알람이 울린다. 밤 9시 50분이다.
“최○○입니다. 늦은 시간에 과제를 올린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몇 시인데 속닥방에 글을 올릴까? 화가 불쑥 나오면서 비난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내게 일어난 그 감정을 마주하고 바라보고 인정한다. 내 감정과 거리 두기이다. 잠시 뒤 잇달아서 속닥방에 사진이 올라온다. 한자 쓰기 공책을 찍은 사진이다. 공책에 한자를 쓰고 나서 펴서 찍었다. 과제가 걱정돼서 늦은 시간이지만 속닥방에 올렸는데 비난했던 마음이 미안함으로 바뀐다.
답글을 썼다.
“○○아, 이거 한다고 정말 애썼구나. 시간을 지켜야 하고, 그런데 한 가지 놓친 게 있었구나. 온라인 클래스 강의 소개 글의 내용을 끝까지 안 읽어봤네. 나도 이런 실수를 가끔 하는데, 다시 읽어볼래? 아무튼, 멋지다. 고마워.”
이 시간이라도 보낸 게 어딘데. 강의 소개 글에 올려놓은 글을 잘못 읽었다고 어찌 비난하랴. 오늘 안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안쓰러우면서 마음이 짠하다. 그때 ○○이의 답글이 올라왔다.
“네. 감사합니다.” 잇달아 “제가 빠트린 것이 있었네요. 다음에는 더 꼼꼼히 글을 읽어서 과제를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을 읽는 순간, 그 마음을 나무랄 수가 없다. 오히려 마음 씀이 너무 고맙고 기쁘다. 답글을 달았다.
“정말 애썼구나. 널 나무란다는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이런 멋진 학생을 만날 수 있음이 고맙지. 공부를 더 잘할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잘 읽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거란다.”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와 있었던 일을 일기로 쓰다가 갑자기 속닥방에 올린 사진이 궁금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썼을까? 속닥방에 올린 사진을 헤아려 보았다. 모두 11장이다. 숨이 턱 막힌다. 도대체 어디까지 쓴 것인가? 늦었지만 전화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속닥방에 전화해 달라고 답글을 남겼다.
전화가 없다. 기다리다 못해 마음이 조급해진다. 전화했다. 받지 않는다. 5분쯤 뒤에 전화 대신 답글이 올라왔다.
“아, 선생님 기·가 숙제를 하느라고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도대체 몇 단원까지 쓴 거니?”
“아, 선생님이 예전에 혜성여자중학교 누리집에 올린 한자를 다 적었습니다.”
코로나 19로 개학이 미루어졌다. 과목마다 학습 자료를 학교 누리집에 올렸다. 2학년 한문은 교과서에 새로 나온 한자, 한 학기를 정리해서 올려 두었다.
“그렇구나. 1학기 과제를 모두 다 했구나.”
가슴이 먹먹하면서 벅차다 못해 흐뭇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강의 소개 글 내용을 제대로 안 읽어봤다느니, 잘 읽는 게 중요하다느니 하면서 내 잣대를 ○○에게 들이대어 마음이 요란했구나.
“○○아, 정말 미안하고 애썼다. 고맙다. 하루 잘 마무리해. 공책 잘 간직하고. 개학하면 다시 확인해야 하니까!”
“네, 선생님!”
속닥방 대화를 마무리했다. 잠시 멈추었다. 호흡을 챙겨 살피면서 앉아 있었다. 과제를 끝까지 해 준 ○○이 마음이 너무 따뜻하다. 무슨 말을 할까? 더 말한다는 게 아이에게 받은 감동이 날아 가버릴 것 같고, 답글에 말을 보탠다는 게 쓸모없는 짓 같았다.
○○의 속닥방 글을 읽으면서 내게 일어난 그 감정을 마주하여 거리 두기를 하지 않았다면? 온 힘을 다한 ○○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 뻔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내 감정과 ‘거리 두기’, ‘알아 살피기’를 정말 잘했구나.
코로나 19로 단절된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공감과 소통과 지지로 마음의 거리를 좁혀 나가자. 그때그때 그 일 그 일이 있을 때마다 나와 내 감정 사이 거리 두기를 해 보자. 일단 멈추고,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자. 내게 일어난 감정의 압력이 낮아짐과 스스로 마주할 수 있고, 내 감정에 내가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안겨 주는 코로나 19, 내 마음과 거리 두기가 더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