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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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 한들신문
  • 승인 2020.05.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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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

이 기고는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이 거창사건 당시 겪은 경험을 책으로 만든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입니다. 한들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로 옮기면서,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책에 사용된 표현까지 그대로 인용함을 알려드립니다.

▶ 차  례 ◀

김종필 선영과 탄원서(1)
김종필 선영과 탄원서(2)◀
제42주기 5회 합동위령제◀
민원제기반응과 법제정을 위해


김종필 선영과 탄원서(2)

부산에 문병현 회장, 서울 문홍환 씨 셋이서 봉고 트럭을 끌고, 충남 부여군 외산면 가덕리에 있는 김종필 대표의 선산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길을 물을 때 훌륭한 분의 선산은 명당일 것 같아서 구경 간다니까, 인심 좋은 충청도분들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김종필 대표가 다녔다는 외산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우측에 있었다.

그곳에는 가족묘를 넓게 조성하여 석물까지 해놓았다가 호화 묘로 지탄받을까 봐 석물은 땅에 묻었다. 우측 산 능선에 쌍봉 묘가 김 대표 부모 묘였다. 호화스럽지는 않으나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고, 부친은 김해 김 공 상배이며 면장을 했고 모친은 전주 이 씨다. 사자의 묘를 볼모로 해코지하여 목적달성을 한다는 것은 우리 또한 5·16과 뭐가 다르겠는가?

두 노인은 해박한 풍수학으로 묏자리가 좋다 하였고, 나는 사진기에 담았다. 두 분의 묘와 지금도 비문이 망가진 채 방치되어있는 517명이 묻혀 있는 박산 묘역과 비교해보라는 자료로 이용할 뿐이다. 서울로 와서 두 어른과 작별을 하고, 이튿날 거창 신원을 향하여 트럭을 몰았다. 07시에 출발하여 휴게소 두 군데 들렸다가 거창에 가면 점심시간이다. 도로가에 주차를 해놓고 시장 안을 두리번거리다 건물 유리창에 메밀묵이란 메뉴를 보고 들어가면 50대 아주머니가 반긴다. 좋아하고 값싼 묵으로 점심을 메꾸고 신원에 가면 오후 2시가 가깝다.

박산 묘역으로 가서 합동 묘와 망가진 비석 사진을 찍고, 과정으로 내려오면, 지인을 만나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회포를 푼다. 서울과 신원 당일 왕복 운행이 힘들어 늦은 시간에 고향 집으로 찾아가면 늙으신 서모님이 반겨주신다. 저녁은 먹었나? 밥을 차려 줄까? 귀찮을 정도로 인정스러워 예 먹었어요. 건성으로 대답을 하고 술기운 때문인지 피곤해서인지 잠들어버린다.

좁은 시골 방에서 편하게 자고 눈을 뜨면 먼동이 터온다. 서모님은 어느새 일어나 부엌에서 밥 짓느라고 덜그럭 소리를 낸다. 아침 식사를 하고 길 떠날 차비를 서둘면, 서모님과의 짧은 만남에 아쉬워함을 뒤로하고, 길을 재촉하여 서울로 와서 사진도 뽑고 탄원서도 작성하고 바쁘다.

지금은 컴퓨터가 흔하지만, 그 당시는 대학교 앞에 가야 타자를 칠 수가 있었다. A4용지 한 쪽을 치려면 한글은 2,000원 한자가 섞이면 3,500원을 주어야 했다. 밀리면 기다려야 했고, 문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가야 하고, 오타가 나면 정정하러 가는데 입력이 되어있으면 쉬우나, 지워져 버렸으면 다시 쳐야 하므로 이중으로 돈을 주어야 했다. 서울에서 신원과 부여를 오가며 사진을 첨부한 탄원서를 만드는데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사업을 해야 할 금쪽같은 시간에 자비를 들여가며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억울한 한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창양민학살사건희생자 원혼들이 나에게 한을 풀어달라고 그 혹독한 피바다 속에서 구해 주었기 때문에, 이 일은 내가 앞장서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1993820일 김종필 대표에게 보낼 탄원서가 완성되어, 부산에 문병현 회장을 불러올려 서울에 이철수 씨와 여의도에 있는 민자당 대표실로 찾아갔다. 김영삼 문민정부라면서 당 대표 좀 만나자는데, ‘거창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에서 전달할 게 있어서 왔다는 데도, 정문 안내자가 약속이 되어있나? 어떤 관계인가? 당연한 절차인데도 짜증스러운 것은 무시당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왔다고 김상윤 보좌역에게 물으면 알 것이다.

김 보좌역은 우리와 구면이기 때문에 출입허락이 되어 들어갔으나, 김종필 대표는 부재중이었다. 김상윤 보좌역이 대표실로 안내하여 주인 없는 방에서, 야당 때 약속한 거창특별법 해결해줄 것, 만약에 우리의 요구를 묵살하면 5·16이 그랬듯이 우리도 박정희 선산, 김 대표 선산이 거창사건박산 희생자 합동묘역과 같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준비해간 사진과 탄원서가 들은 봉투를 대표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왔다. 협박하는 것 같아 심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당시 박준규 국회의장은 330일 의장직을 사직하면서, “지금은 모진 비바람이 지나가는 추이를 눈여겨 지켜보겠다.” 입법부 수장이 그 자리를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도 우리 법의 추이를 똑바로 지켜볼 것이다.

 

42주기 5회 합동위령제

민자당 당사를 나와 찻집에서 199395, 합동 위령제에 초대할 재경 향우 및 유족 섭외와 버스를 대절하는 문제를 내가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헤어졌다. 올해 합동 위령제와 추모행사는 작년과 같은 장소인 박산 묘역 뒤편 예비군훈련장소로 사용했던 곳으로 정했다.

합동 위령제날 추모객은 박찬종 신정당 대표, 곽정출, 이강두 민자당 의원, 김말용 민주당 의원 등 1,3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1부는 합동 위령제, 2부는 추모식, 3부는 한풀이 한마당, 합동 위령제는 초헌, 아헌, 종헌 순으로 전 유족이 나와 절을 하였다.

추모식은 국민의례를 마치고, 처음으로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내 가슴은 쿵쿵거리며 다리는 후둘 거렸다. 그래도 처음 해보는 경과보고를 힘차게 끝내니까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어서 국회의원들의 추모사와 유족회장의 인사말로 2부 행사를 마치고, 3부는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의 한풀이 굿을 끝으로 모든 행사는 끝나고 돼지국밥에 신원 막걸리를 겹들인 점심이 제공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행사범위가 커지니까 공권력이 긴장하는 것 같다. 거창경찰서 정보계 형사들이 행사장 주위를 서성이며 감시를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5·16이 넘어트린 위령비를 제자리에 세우기 위해, 박찬종 신정당 대표와 참석한 국회의원, 유족들이 동원되었으나, 육중한 비석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라 시작을 했다는 데 뜻을 두었다.

한풀이 한마당 경과보고
한풀이 한마당 경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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