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7 "구수(구시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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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7 "구수(구시골)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5.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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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jonga8280@hanmail.net)
마을 입구 표지석
마을 입구 표지석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삶을 담는다. 고통과 좌절, 희망이 교차하는 길은 개인의 역사이자 공동체의 기억이 스며있다.

적화 길은 14개 동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녹아 있다. 적화로 들어오는 첫 동네가 구수마을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3번 국도가 마을 앞을 지났다. 마을 앞 급커브는 교통사고가 잦았다. 주민의 요구로 직선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동네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옛 마을 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옛 마을 터

마을의 시작

구수마을은 구시골이라 불린다. 골짜기가 소구시(소 여물통)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의 구시 형국의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구시골이라 불렀다. 풍수설에 뒷산은 소와 같고 마을은 구유 형국인데 구유의 경상도 방언인 구시가 구수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시점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이다. 최 씨 집안의 한 분이 일제 강점기 의병에 가담했다가 가북면 풀씨기(푹시기)에서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왔다. 그 후 가동띠기네, 군암띠기네, 우동띠기네, 연안띠기네, 얌띠기(용암), 임실띠기네, 숭사이(숭산)띠기네가 웃담에 살았다고 기억한다. 아랫땀에도 몇 가구가 이주해왔으나 마을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외딴집이었다.

현재 마을 모습
현재 마을 모습

일제 강점기 구장과 구수골

구수는 군암리에 속한다. 동네가 작다 보니 구장은 큰 마을에서 말발깨나 하는 사람 차지였다. 일제 강점기 구장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징집 대상이 결정되던 시절이라 누구 하나 구장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으며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어느 날 구장이 재를 넘어와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아먹자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눈치만 보고 있는데 마을 터줏대감인 최 씨 어른이 그러자며 흔쾌히 승낙했다. 마침 최씨 어른 딸네가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 사위가 재를 넘어 군암에서 방아를 찧어오니 마을잔치가 벌어져 있었다. “한창 애롱애롱 크는 돼지를 잡은 것을 알고 사위는 얼마나 화가 치밀었던지 돼지 삶는 솥 밑의 벌건 불을 맨손으로 집어 확 퍼 흩뜨렸다고 한다. 사위의 예상치 못한 반란에 장인 영감(최 씨 어른)젊은 놈이 버릇없는 짓을 한다고 소리를 지르고, 딸은 분을 참지 못하는 남편과 불호령 하는 친정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허둥대다 불덩이를 맨발로 밟아 오랫동안 고생하였다고 한다.

 

소개(疏開) 명령으로 마을이 불타다

1945510일 실시된 최초의 선거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이른 시간에 마당재를 넘어 군암리 투표소로 갔다. 그런데 오전에 투표를 마치고 왔는데 다시 오라고 해서 마을 어른들은 무슨 일인지 걱정하며 다시 투표하러 갔었다고 한다.

6·25 전인지 이후인지 동네 분들의 기억은 엇갈리는데 야산토벌대 작전으로 마을이 전부 불탔다. 군인들이 들어와서 빨갱이가 내려오니까 마을을 비우라고 명령했다. 영문도 모른 채 마을 사람들은 용전마을로, 더러는 친척이 있는 동네로 피난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피난을 가 있던 사람들이 연기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동네는 이미 잿더미가 되었다. 당장 살 곳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갈대를 베어 와서 꽈대기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군인들이 동네를 불태웠으나 동네 사람들은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독가촌 집단화 사업으로 아랫땀에 형성된 마을

1968년 김신조 무장간첩단 침투사건이 일어나고 공비들이 산간지역, 동해지구에 침입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산속에 흩어져 있는 집을 한군데로 모아 독가촌 집단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새로 마을이 형성된 곳은 아랫땀 뽕나무밭이었다. 집터는 주민이 마련하고 정부에서 집을 짓는 자재를 지원하였다. 규격화된 건축물 한 채에 2가구가 살아야 했다. 마을에 7채가 지어졌고 14가구가 한데 모여 살았다. 당시 웅양면에는 강천새마을과 구수마을이 독가촌 집단화 사업 대상이었다.

취락지구 독립가구 집단화주택 입주증과 약정서
취락지구 독립가구 집단화주택 입주증과 약정서

하지만 그때 땅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하지 않은 서너 집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아들은 객지에 있는데 땅 주인이 나타나 무단 건물 철거 요구서를 보냈다. 자신의 부모가 산 땅에 집을 지은 것으로 안 자식들은 당혹스러워했다. 등기가 되어 있지 않은 땅을 부모가 산 땅이라고 증명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동네 분이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하였다. 타지에 사는 자식들은 억울했지만, 재판을 위한 변호사 비용과 차비가 집터 값보다 더 들겠다며 포기하고 말았다.

한 마을 분은 당시 증거가 있다46년 전의 입주증과 약정서를 찾아 보여주었다. “5년간 거창군 재산으로 되어 있고, 입주자는 임의로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거나 재 입산을 하면 주택 및 개간농토에 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얼룩지고 빛바랜 종이 위에 구수마을 사람들의 삶이 그려졌다.

 

마을의 역사는 세월을 견디어 낸 상처와 만나는 시간이다. 일제 강점기 시작된 구수마을의 역사는 우리의 험난한 현대사를 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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