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장이 찾아가는 조합원 인터뷰]윤진구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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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이 찾아가는 조합원 인터뷰]윤진구 조합원
  • 한들신문
  • 승인 2020.06.0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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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변화로 학생을 사랑한 평교사 ‘참교육자’ 윤진구 조합원

윤진구 선생님을 다시 만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난날을 거닐 듯 담담하게 풀어 놓는 이야기에 마음이 아프고 저리다.

1970년대 말부터 교편을 잡았는데요. 그때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1977년 첫 발령을 받았어요. 거창에서 가까운 산청군 생초중학교였어요. 지금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박항서 감독의 모교지요. 박 감독이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이었는데 청소년 국가대표로 출전해 세계 청소년 축구에서 활약한 뒤 귀향해 모교에서 환영회를 가질 정도로 축구 열기가 대단했죠.

1970년대 후반기에는 정치적으론 박정희 대통령 유신독재 말기였지요. 교육 현장도 관료적 권위주의가 팽배했어요. 학교장을 중심으로 교감, 주임 교사, 교사의 수직적 구조 속에서 상급 기관의 지시, 명령이면 어떠한 비판 없이 움직이는 학교 현장이었죠. 방과 후 젊은 교사들이 모여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도 나누고 나면 이튿날 교장실에 불려가 주의를 받던 때였어요. 반유신 독재 투쟁의 최선봉이었던 대학에서 연례행사처럼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렸던, 20대 중반 젊은이의 눈에 비쳤던 교육 현장의 모습은 암담했죠.

경남교육청이 부산에 있을 때라 경남 서북부 지역 학교에는 초임 교사가 많았어요. 제가 있던 학교에도 젊은 초임 교사가 많아 학교 현장의 모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기 시작했죠. 교사들의 정성으로 재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필봉장학회도 만들고, 남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까까머리에서 스포츠형 머리카락 상태로 변화시키기도 했지요. 당시의 권위주의적 분위기에서 젊은 교사들의 시도가 얼마나 무모하게 보였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젊은 교사들의 건의를 받아주신 교장 선생님의 결단이 대단하신 거지요. 그때는 학교장을 비판한다거나 학교장이 판단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되는 교사를 학교장의 요구로 다른 학교로 전보 조처가 가능했던 때였어요. 학교장의 권한이 막강했다고나 할까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젊은 교사들은 학생들과의 관계가 밀접해 참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했습니다. 요즘 젊은 교사들도 학생들과 호흡을 잘 맞추듯이 그때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첫 발령학교 졸업생들과 만나면 40여 년 전 그때를 떠올리며 웃곤 합니다. 가난의 흔적이 많이 남았을 때라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도 남학생은 공업계 고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학생은 주경야독하는 산업체 부설 학교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요. 또 중학교 졸업으로 학창 생활을 끝내는 학생도 있었지요. 이렇게 초임지에서 3년을 보내고, 합천종고 (현 합천고), 하동 금남고를 거처 1984년 거창농고(현 아림고)로 왔지요. 부모님께서 대구에 계셔서 가까운 곳으로 온 거죠. 잠시 머무르다 발령장 한 장에 떠나는 철새 같은 인생의 공립학교 교사들, 저 역시 거창에 잠시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가야지 했는데 주저앉아 36년을 보냈어요. (웃음)

 

전교조 해직 교사인데요. 할 이야기가 많으시지요?

70, 80년대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혼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대였잖아요? 학교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죠. 특히 19876월 항쟁 이후 군부 독재 시대에 억눌려 왔던 사회적 모순,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는 격동의 시대였죠. 교사들도 일선 현장에서 교육자적 양심에 비춰볼 때 분노와 자책에 빠질 때가 많았지 않습니까? 인간교육이 아니라 인간 사육……. 좀 지나친 말일까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교사들의 비공개적인 소모임 활동은 고립 분산적으로 진행되었고, 조금만 트집이 잡혀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요. 이런 현실에서 교사들은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거창에서도 198539일 거창 YMCA의 도움을 받아 중등교사들이 모여 거창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를 만들어 교육 운동을 시작했어요. 전국에서 군 단위 지역으로는 충남 홍성에 이어 두 번째 조직이었지요. 19877전국교사협의회’, 19895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어 교육 운동이 양적, 질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요. 그러던 중 탄압국면을 맞았고, 결국은 파면이 되었지요. 거창 지역에서 초등교사 3, 중등교사 3명 모두 6명이 해직되었고요. 단지 현장의 모순을 뼈저리게 함께 느낀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리는 때가 많은데요. 해직되던 19897월 근무했던 학교 전교생들이 학기말 시험을 거부하며 저에 대한 징계의 부당함을 군민들에게 호소하며 가두시위한 것에 대해 가진 부채 의식, 지회 사무실에 무더운 여름날 선풍기를 사서 찾아오신 동료 교사의 고마움, 전교조 홍보물을 갖고 학교 현장 방문 때, 현관 입구에서 교무실 출입을 온몸으로 막던 교장에 대해 느꼈던 애매한 낭패감, 해직 교사 생계 보조와 활동비 마련을 위해 제작 판매하는 상품 보따리를 들쳐 매고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교장의 매서운 감시 눈초리로 접근을 못 해 한 점의 상품도 팔지 못하고 다시 보따리 뭉치를 둘러매고 교문 밖을 나설 때 느꼈던 벼랑 의식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립니다. 제가 너무 감상적일까요? 그래도 지금은 웃으며 넘깁니다. 전국의 많은 시··구 지회 중에서 모범적으로 지회를 꾸려 나간 데는 거창의 많은 동료 교사들의 성원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40여 년 가까이 교단 안과 밖에 있었어요. 일화 좀 소개해 주세요.

되돌아보면 즐겁고 보람된 일도 많았고 괴롭고 힘든 일도 많았던 것 같아요. 70년대 말쯤 전자계산기가 보급될 때였지요. 첫 발령을 받았을 무렵에는 주판을 이용해 학생들 성적을 산출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주판이 어떤 것인지 아예 모르지요. 당시 학급 당 학생 수(60~70)가 많고 주판의 사용능력은 서툴러 성적 계산에 오류가 많을 때, 전자계산기의 등장은 교사들에게 가히 혁명적 변화였다고나 할까요. 당시로선 가격도 비싼 편이었고요, 한 달 봉급이 10만 원 정도였을 때 계산기가 15,000(한 달 하숙비가 17,000)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숙직하는 날 학교에 도둑이 침입해 교무실 책상을 뒤져 교사들의 계산기 10여 대와 운동장 급수대 수도꼭지를 몽땅 훔쳐 가는 바람에 두 달 봉급을 몽땅 계산기 사는데 쓴 일도 있었지요.

유신 시절 연례행사로 가을이면 퇴비증산작업(새마을운동)의 목적으로 마른 풀을 수집했어요. 학생들이 낫 들고 학교 인근 산으로 올라가 풀베기를 하던 중 한 여학생이 땅벌 집을 건드려 벌에 쏘여 실신하는 바람에 학생을 업고 산에서 내려왔던 일도 있었고요. 80년대 5공 시절에는 교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마을별로 반상회에 참석해 정부 시책을 전달하곤 했는데, 학부모들과 밤늦게까지 얘기하다 학생 집에서 학생과 함께 자고 아침에 학부모가 해주신 감자밥을 먹고 출근했던 일이 마음 한구석에 예쁘게 남아 있네요.

89년 해직되고 인근 합천, 함양에 있는 학교를 돌며 전교조 홍보물을 전하곤 했는데, 당시에 많은 학교에서 전교조 해직 교사의 학교 방문을 막곤 했어요. 한 번은 합천군 내 ㅅ고등학교를 방문했다가 교감 선생에게 멱살을 잡혀 학교 밖으로 끌려 나온 일도 있었고요. 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해직 교사 복직을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에 대해 지지를 호소하며 함양지역 학교를 방문했을 때였어요. 학교장의 신고로 함양경찰서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피의자 조사를 받고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던 일도 있지요.

99년 거창여중에서 여학생들의 두발 자유화를 주도하다 여교사들의 집단 반발(?)에 봉착했던 일, 학기 초 바쁜 3월에 신입생들을 위한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했던 일, 2005년 웅양중학교에서 전교생 55명의 덕유산 종주 12을 추진하던 중 초임 교장에게 세 번이나 불려가 행사 중단을 권고받았던 일, 지나온 세월만큼 울고 웃을 일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림신문창간추진위원이더라고요. 한들신문이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요?

88년은 여소야대 국회의 등장, 3당 통합, 평민당의 장외투쟁, 국회 공전 등으로 정치적 대공황의 시기였지요. 아림신문이 만들어진 때가 그 무렵 8910월 경입니다. 지방자치 시대를 앞두고 지역의 여론을 진실하고 정확하게 대변할 신문을 개인이 아닌 지역민이 함께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당시 거창지역 신문은 거창신문, 아림신문 정도였어요. 전국적으로는 충남 홍성신문, 전남 해남신문, 경남 남해신문이 지역 신문으로 독자층이 두꺼웠고 지면의 보도 기사나 칼럼, 사설 그리고 편집이 꽤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언론의 최대 적은 침묵이라고 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힌 연고주의와 기득권과의 연결고리에 굴하여 군민의 알 권리를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를 저버리는 행위죠. 거창 인구가 6만여 명인데 도대체 신문이 몇 개입니까? 현재 지역 언론의 현주소는 지역민의 호응과 참여, 그리고 건전한 여론조성 기능이 절대적으로 미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군청의 보도자료를 받아 쓰는 형편이다 보니 모든 신문이 차별성이 없이 비슷한, 특성 없는 신문이잖아요? 기득권의 이득만을 위한 비합리적인 담합이 남아 있는 사회에서 지역 언론이 이를 방관하거나 묵인, 심지어 이를 대변함으로써 언론사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러한 지역 신문의 한계를 통감하면서 기득권의 일방통행에 제동하는 진보적 언론사 탄생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언론은 행정기관, 선출직, 사회지도층. 기득권 세력 편에 서는 게 아니라, 군민의 편에서 군민을 섬겨야 하죠. 원론적 얘기지만 군민의 눈으로 보고, 군민의 목소리를 충실히 전달하는, 평범한 이웃들의 작은 이야기를 소중히 담아내는 지역 신문, 군민이 독자이자 뉴스 생산자인 쌍방향 언론, 다양한 군민의 삶을 조명하고 소수의 작은 목소리도 바르게 전달함으로써 군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합리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전파하는 공익적 가치 전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렵죠?

 

선생님이 무심한 표정으로 이어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감동? 맞다. 그리고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다. 커다란 키에 머쓱한 표정의 선생님이 만들고 겪는 에피소드(?)가 울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웠다. 그랬다. 그런 대접을 받으며 일구어 온 오늘이다. 선생님이 살아온 삶의 가치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며 남은 역할을 기껍게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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