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고추장을 다 먹고 폴란드에서 한인 상점을 못 찾아 아시아 상점에 꼭 가리라 마음먹은 독일 베를린. 밤새 달린 버스로 도착하니 이른 아침,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도 감기엔 보글보글 고추장찌개가 최고! 당장 나을 거라며 한인 상점을 찾아갔습니다.
오랜만에 거금을 들여 한국 식료품을 사고 숙소로 돌아올 때 떡볶이 두세 번은 해 먹겠군, 고추장 한 달은 쓰겠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독일 베를린의 한 호스텔에서, 작년 칠월 이집트 다합에서 한솥밥 먹으며 어울린 식구 중 독일 뮌스터 성악 유학 중인 친구와 우리처럼 긴 여행 중인, 친구를 만났습니다. 다시 만나자마자 얼마나 반가운지 뜨겁게 포옹하고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온몸과 얼굴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오늘 저녁엔 고추장찌개를 먹자~. 하니 와~~~. 그렇게 무궁 씨의 기가 막힌 요리로 저녁을 먹었고, 그다음 날엔 떡과 어묵을 탈탈 털어 떡볶이 한 솥을 했습니다. 만드는 중에 다 쓴 고추장 통은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빈 고추장 통을 버리며 장독에 장이 그득하면 마음이 넉넉해지셨다는 옛날 엄마들의 마음이 생각나 피식 웃었습니다. 빈 고추장 통을 버리며 벌써 다 써버리다니……. 아쉬운 마음이 슬그머니 오는데 문득 그간 받아 온 많은 것, 제게 거저 주신 분들을 떠올랐습니다.
셀 수없이 많은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 때론 너무 많아요 하고 사양하고 싶을 만큼 때론 너무 자연스러워 감사마저 무뎌질 만큼 그렇게 주고 또 주시던 사랑 많은 분들과 기쁘게 받아 누리며 부족함 없이 살아온 지난 삼십 년, 아쉬운 마음은 어디 갔는지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할 여력과 기회가 있음에 그저 고마울 뿐이에요.
빈 고추장 통을 버리며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생각할 것이 이거구나! 배웁니다. 스물넷부터 제 안에 있는 물음은 ‘이렇게 많이 받는데 죽을 때까지 갚으며 살아도 다 갚을 수 있을까?’ 다 못 갚고 죽을 것이 확실합니다만 사랑 빚 갚는 기회는 솔선하여 선점하고 싶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그 기회를 누리고 싶습니다. 빈 고추장 통을 버리며 풍성한 마음으로 미소 짓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얍! 2015.01.22. 독일 베를린
여행자의 신분이 아니면 간절해지지 않는 것이 한국 음식인 것 같습니다. 흔해 빠진 고추장이나 라면 수프가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처럼 절실해집니다. 어쩌면 먹는 것에서 ‘그리움’이라는 욕구까지 해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직접 만든 맛있는 고추장도 아니고 슈퍼에 파는 공장형 고추장 한 통에서 별생각을 다 했지만, 확실히 뭔가 좀 부족하고 모자란 상황에서 알아차리게 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자 해 놓고 어쩐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 것을 기꺼이 거저 내어 주는 착한 사람들 속에서 받기만 하며 사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2020.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