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①-근대의 시작, 1862년 거창의 농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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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①-근대의 시작, 1862년 거창의 농민항쟁
  • 한들신문
  • 승인 2020.06.0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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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농민항쟁은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로 인해 그해 2월 진주와 이웃한 단성현에서 시작된 이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 지방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거창에서도 삼정의 문란으로 불만을 품은 농민들이 거창 부사 황종석이 진주 항쟁을 살피러 떠나 자리를 비운 사이에 봉기하였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기의 거창 사람들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이었다. 세도가들에게 뇌물을 주고 거창 고을의 수령 자리를 사 온 원님은 부임하는 첫날부터 본전 뽑기에 혈안이 되어 농민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전이라고 하는 6방 관속들을 시켜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부정은 삼정의 문란이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하는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행정을 말한다. 먼저 전정은 토지에 매기는 세금이다. 전정의 종류는 전세미, 대동미, 삼수미, 결작 등을 포함하여 44항목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법으로 매기는 세금은 1결당 23말 안팎이었으나 세도정치 시기 초반(19세기 초반)에 이르면 60~80말까지 올라갔다. 원래 전세는 토지소유자인 양반 지주가 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힘없는 소작 농민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전세를 내는 과정에서도 관리들이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결가를 높게 책정하는 것이었다.

결가란 전세를 쌀로 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상평통보로 내게 하던 제도였는데, 이때 지방의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지게 했다. 쌀값이 제일 비쌀 때의 가격을 세금으로 책정해 돈으로 받아두었다가 쌀값이 가장 쌀 때인 가을에 쌀을 중앙에 바치는 방법으로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군정은 양인 농민을 대상으로 군포를 받아들이는 행정을 말한다. 당시 중앙 정부는 군총제라 하여 군현 단위의 군포세수 총액을 일방적으로 결정해주고 이를 거두어들이도록 하였다. 이 총액제는 지방의 사정을 돌보지 않고 편리하게 세금을 걷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신분 상승 운동과 농민들의 피역 저항(군역을 피하려고 도망을 가거나 양반 신분을 위조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여 군역을 피하려고 하는 저항)으로 군역 부담자인 양인 농민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데도 세금은 옛날과 같은 형편이었다. 따라서 남아 있는 농민이 그것을 다 부담하였기 때문에 몇 곱절의 부담이 되었다. 수령들은 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등의 방법으로 군포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당시 거창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당시 거창 사람이 불렀다는 거창가는 군포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뒷집의 우는 아기 이교왔다 우지마라

황구첨정 가련둥이 백골징포 중생이라

관문 앞에 저 송장은 너 죽은 지 몇 해건만

죽은 송장 다시 내어 백골징포 한단말가

원통타 우는소리 동헌 대공 함께 운다.

청산백수 우는 아이여 너의 울음 처량하다.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했던 서슬 퍼런 이교(조선시대 관아의 하급관리인 이서(吏胥)와 군교(軍校)를 합하여 이르는 ), 젖먹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던 황구첨정, 죽은 사람의 군포를 자식에게서 받아들였던 백골징포는 거창의 모든 농민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1862년의 거창 농민항쟁은 읍내의 영천 장날인 321일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진주 항쟁 이후 농민항쟁이 확산하는 추세를 보면 함양이 316, 성주가 326일이기 때문에 그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부사 황종석이 진주 항쟁으로 자리를 비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농민항쟁의 주모자인 이시규, 최남규, 이승문 등은 통문을 돌려 농민을 모았다. 농민군은 읍내 근처에 모여 지방 관청에 소속된 서리, 장교, 관노, 사령의 집을 공격하여 불살랐다. 이어서 관아로 쳐들어가 부세 창고, 부세 장부를 부수고 또한 불살랐다. 부사 황종석은 이 소식을 듣고는 대구 감영에 휴가를 얻어서 거창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바로 서울로 도망을 치니, 자연히 거창읍권은 농민이 장악하게 되었다.

510일 중앙에서 파견한 선무사 이참현이 거창에 다다르자, 농민들은 통문을 돌려 다음날 다시 모이자고 연락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참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형식적인 절차를 마친 뒤 서둘러 거창을 빠져나가 성주로 향하였다. 이참현이 빠져나간 것을 뒤늦게 듣고 이참현을 쫓아간 농민들은 결전 13냥을 7냥으로 낮추어 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거창 농민항쟁은 528일 경상도 관찰사 이돈영의 장계로 비로소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황종석은 파면되었고 감영에서는 포졸을 풀어 주모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암행어사 이인명이 거창에 와서 이들에게 한 차례 형벌을 주었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려고 대구부로 압송하는 과정에 농민의 습격을 받고 주모자들이 구출된다. 그러나 이인명이 감사와 병사에 하루빨리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약 두 달 뒤에 최남규와 이승문이 붙잡히고 그 뒤 이시규 또한 체포되고 만다.

암행어사 이인명이 중앙에 올라가 75일 보고서(서계와 별단)를 올렸다. 여기에 따라 부사 황종석은 의금부에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은 뒤 곤장 100대를 맞고 상주목으로 정배(추방, 유배) 당하였다. 주모자인 최남규와 이승문은 810일 처형당하였으며, 이시규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거창 농민항쟁은 끝이 나고 만다.

1862년 농민항쟁은 농민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참여하여, 조세 수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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