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8 "오산마을"
상태바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8 "오산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20.06.16 18: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을의 역사는 그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성마을역사연구회 백종숙(jonga8280@hanmail.net)

적화의 중심지가 된 오산마을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로변
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로변

오산마을은 적화의 중심지이다. 하성초등학교(단노을 생활문화센터), 농협, 교회, 보건소, 방앗간, 식당 등이 있다. 1939년 웅양 제2심상학교가 세워지면서 학교를 중심으로 동네가 형성되었다. 1968년 리동농협을 통합한 하성농협이 들어서면서 14개 동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3번 국도가 적화를 지나면서 도로를 중심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원)오산마을 전경
(원)오산마을 전경

()오산마을의 역사

원래 오산마을은 한기마을 들어가는 길 왼쪽에 위치한다. 옛날에 마을 앞에 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오동나무 오(), 뫼 산() 자를 써서 오산이라는 설과 마을 뒷산이 큰 자라와 같이 생겨 자라 오()자를 따서 오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 이름은 한자어로 오산(梧山)으로 표기하였으나 지금은 오산(吾山)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에 큰불이 나서 신오산으로 이주하여 신오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불이 난 시기는 일제 강점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은 한 필지로 된 밭이었는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산마을 입구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 구성원은 1950년 이후에 이주해 온 분들이 대부분이다. 학교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마을이 점차 커졌다. 마을 분들의 기억을 토대로 한 마을 이야기는 1950년대 후반에서 시작하였다.

현재 마을은 약 41, 마을주민은 89명이다. 다른 마을에 비해 가구는 많은 편이지만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다. 해마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마을 경로당은 70세가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원오산 마을벽화, 방앗간이 있었던 자리를 설명하시는 마을분
원오산 마을벽화, 방앗간이 있었던 자리를 설명하시는 마을분

학교와 마을

193810월 오산마을 앞 논들에 모인 사람들이 적화학교 설립추진 기성회를 발족하였다. 이들은 학교 터 구매비를 마련하여 학교를 짓자고 뜻을 모았다. 지역유지, 출향인, 지역주민의 적극적 참여로 사천여 평의 학교 터를 마련하였다. 당시 학교 터를 마련하는데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은 적화주민도 적은 금액이지만 협찬금을 냈으며 학교 지을 때 동네별로 부역을 하였다고 한다.

1988년 이후 학생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9년 하성초등학교는 문을 닫았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황폐해졌고 그것을 바라보던 주민들이 폐교 살리기 운동을 펼쳤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추억이 담긴 학교는 하성 단노을 생활문화센터로 주민에게 돌아왔다. 이제 학교는 14개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단노을생활문화센터로 바뀐 하성초등학교
단노을생활문화센터로 바뀐 하성초등학교

 

농협, 오일장, 3번 국도

오산마을 역사에서 하성농협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성농협은 19683개의 리동조합을 합병하여 탄생하였으며 고랭지 채소 재배, 양잠단지 조성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오산마을에도 오일장이 섰다. 사람들은 적화장이라 불렀으며 거창장과 웅양장 사이인 2, 7일에 장이 렸다. 하지만 적화장은 그리 오래 운영되지 못했다. 하성학교 교실이 부족했을 때 시장 점포에 칠판을 걸어놓고 공부하기도 했다. 시장이 문을 닫은 후 시장터는 천막을 쳐 놓고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13년 거창-우두령-김천을 잇는 신작로(3번 국도)가 나면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오산은 하루에 한 번 막차로 들어온 버스가 첫차로 나가는 적화차의 종점이었다. 1973년 진주-김천간 3번 국도 포장공사 계획이 발표되자 14개 마을 분들은 3번 국도가 적화를 경유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세월이 흘러 3번 국도의 확장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기존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우두령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적화중심지의 상점

1939년 웅양에 양조장이 설립된 후 적화에도 양조장이 생겼다. 마을 분들은 도가 마당에 꼬두밥(고두밥)’을 쪄서 널어놓았던 모습을 이야기하였다. 술도가는 196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다.

기름집은 농협 사무실 밑에 있었는데 초기에는 주로 산초기름, 아주까리기름을 짰다. 산초기름은 식용유가 귀하던 시절이라 전을 부칠 때 주로 사용하였으며, 아주까리기름은 사람들이 선호하였다. 아주까리기름은 머릿기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변비가 있을 때 먹기도 하였으며, 호롱불에 사용하였다. 석유는 시커먼 연기가 나는데 아주까리기름은 연기가 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학교 옆에 문방구가 생긴 것은 1962년쯤이었다. 약방이 문을 연 것은 1962년쯤이었다. 적화에 1970년 초에 큰점빵이 있었다. 그곳은 만물상회였는데 오만 게(속옷까지 있었다고 함)다 있었던 잡화점이었다.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

이 마을에서는 농번기 한 달 동안 마을 공동급식을 4년째 해오고 있다. 10월부터 4월까지 농한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는다. 또한, 음력 섣달그믐날에는 동네 주민들이 관광 차를 내어 가조 온천으로 목욕하러 간다. 새해맞이 묵은 때 씻기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마을보다 단합이 잘된다고 한다. 하성 단노을 생활문화센터의 행사와 활동에 마을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9년 오산마을역사공부
2019년 오산마을역사공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