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상태바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
  • 한들신문
  • 승인 2020.06.16 1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

이 기고는 김운섭 전 거창사건유족회장이 거창사건 당시 겪은 경험을 책으로 만든 ‘거창양민학살 억울한 죽음 뒤처리’입니다. 한들신문은 당시 김 전 회장이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기고로 옮기면서, 생동감을 전하기 위해 책에 사용된 표현까지 그대로 인용함을 알려드립니다.

▶ 차  례 ◀

민원제기반응과 법제정을 위해◀
합동위령제와 청와대 앞 기습시위◀
1995년 8월 24일 제7회 44주기합동위령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1)◀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2)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3)
고유제


민원제기 반응과 법 제정을 위해

김종필 민자당 대표는 1993107, 유족들이 민원을 제기한 지 47일 만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통해 거창사건 명예회복법민원이 끊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반대하지 않으니, 야당과 합의하여 처리하라는 강재섭 대변인 공식 발표가 나왔다. 14대 국회 초기에 이강두 의원이 발의하여, 다루어지지 않고 애를 태우더니, 112일 갑자기 민자당 당무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집권당 당무회의를 통과했다면 희망적이다. 당 대표를 자극한 노력의 성과라고 고무(鼓舞)되어 힘이 생겼는데, 난데없는 복병이 나타났다. 산청·함양사건이 40여 년간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숨죽이고 있다가, “거창양민학살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이 언론에서 제정 가능성으로 비치니까, 유족 40여 명이 자기들도 끼어달라고 국회 앞에 와서 농성한다는 것이다.

산청·함양 국회의원은 권익현이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때 당 대표와 요직을 겸한 막강한 권력자의 전성기 때도 그들은 방관만 하고 있었다. 이강두 거창 국회의원은 초선이라서 힘이 없다. 모든 것이 우리 유족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권익현 의원이 산청·함양을 끼워 넣기 위하여 제동을 걸었다.

1130일 신원에서 버스 2대를 대절하여, 신원 부산 서울 유족 80여 명을 싫고 여의도 민자당 당사로 몰려갔다.

거창학살 해결하라.” 그러나 모두가 장거리 버스에 지쳤는지 힘이 없다. 단 한 여인이 구호를 외치며 열성적이었는데, 조성제 모친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사건 당시 신원초등학교에 감금되어 있을 때 성제가 너무 울어 데리고 나가라 하여 모자는 나왔고, 성제 아버지는 나오지 못해 박산으로 끌려가 희생되므로 평생을 성제 하나만 키우며 살았기 때문에 한이 많으신 분이다. 이날 농성은 큰 비용과 인원 동원의 노력에 비해 성과는 이강두 의원이 나와서 여러분의 뜻을 알았으니 돌아가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이날 집회를 돕기 위해 당사 주변 길가에 장시간 주차를 하여 5만여 원의 주차비를 물어주었다.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유족들의 노력으로 민자당 당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이, 산청·함양의 방해로 1993년 정기국회에서 다뤄지지 못하고 끝났다. 유족들 입에서 누군가 또 한 사람 죽어야 해결 나려나? 섬쩍지근한 말이 나왔다. 또 한해를 넘기고 19944월 임시 국회가 열렸다. 유족대표들은 우리 지역 이강두 국회의원과 김종호 정책위의장, 김종필 대표를 차례로 찾아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면전에서는 하나같이 긍정적인 답변을 한다.

민자당 당사 앞에서 농성
민자당 당사 앞에서 농성

4월이면 생업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신원으로 국회로 각 정당으로 연일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생업을 소홀히 하여, 겨울에 일 년간 팔아야 할 물품구입을 해놓아야 하는데, 금년은 못했다. 사업장은 엉망이고 가정마저 삐걱거렸다. 조경업은 4월부터 시작이다. 꽃 가게를 겸한 사업장을 지키는 아내가 유족회 일을 열심히 하면, 돈이 나오는 줄 알고 지켜보다가, 수년간 가져가기만 하니까,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업을 해야 할 시기에 팔아야 할 물건이 없고, 공사도 부진하니까, 부부 마찰이 잦았다.

누구를 탓하랴, 인생의 중차대한 기로에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철천지한이 맺힌 원한을 풀어야 할 일인데 그런 말을 가족에게 못했다. 아내가 야속했다. 하늘을 보고 허허, 먼 산을 보고 허허, 허탈한 심정을 소주로 적시며, 여러 날을 연희동과 가까운 홍은동 주점을 방황하다가, 이러다가 죽지는 않고 술병이 생기면 폐인이 되겠다 싶어 정신을 차렸다. 1994년 봄, 여름을 허탈하게 보내고, 9월에 있을 합동위령제 경과보고 작성에 몰두했다.

 

합동위령제와 청와대 앞 기습시위

거창양민학살사건643주기 합동위령제93일 날 봉행 되었다, 이강두 의원과 민주당에서는 유준상 의원이 참석해주었다. 경과보고를 통하여 현 정권이 거창 법 제정을 약속해놓고 미온적인 태도에 대하여 민생을 외면하는 정권이라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것은 메아리일 뿐이다.

위령제를 끝내고 두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청와대 앞 기습시위를 모의하였다. 97일 신원, 부산 유족과 서울 유족이 청와대 정문 앞으로 가기 위해 한패는 효자동 쪽으로, 나는 경복궁 정문으로 돌아 플래카드를 돌돌 말아 들고 가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빼앗겼다.

효자동으로 가던 일행도 불심검문에 중도에서 막혔다. 우리가 시위한다는 정보가 들어간 것 같았다. 청와대로 가는 간이 경비초소에서 대통령 면담을 해달라고 떼를 써보아야 소용없었고, 초소장이 높은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주려고 성의를 보였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종로1가에 정해놓은 여관으로 돌아와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발송하고, 정부 종합민원실에 대통령 면담신청서를 접수하고 해산했다. 소수의 인원으로 시위는 회를 거듭할수록 힘이 없고 성의가 부족하여 실망스럽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호소문과 면담 신청에 대한 반응이 없어서, 이철수 씨가 작성하여 보냈다는 면담신청서를 검토해보니 발신자 연락처가 빠져있었다. 9월과 12월에 대통령 면담 신청, 김종필 대표에게 호소문을 보내도 답이 없다. 그런 정부의 관료들은 망발(妄發)도 잘한다. 1995512일 김숙희 교육부 장관은“6·25는 동족상잔이었고 월남전은 용병으로 참전에 명분이 약했다.”라는 망언(妄言)을 하여 해임되었다. 무심한 정부를 원망하며 이강두 의원을 재촉했다.

710일 이강두 의원은 통일·외교 분야 대정부 질의에서 북한에 경수로 쌀 지원보다 6·25동란 중에 발생한 거창양민학살 명예회복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총리에게 물었다. 이홍구 국무총리는 과거사에 잘못된 사건처리는 국회나 신망 있는 단체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노력이 가시화될 때 지원 하겠다,” 너무나 거시적인 답에 유족들은 분통이 터진다.

 

1995824일 제744주기 합동위령제

박산 묘역 뒤편에서 일곱 번째 갖는 합동위령제는 거창군청 사회과에서 제비를 보태어 주관하였고, 정주환 군수가 초헌관을 했다. 추모객은 이강두 의원과 민주당에서 김말용 의원, 김진석 신라 김 씨 총재 외 1,2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국민의례를 하고 이어 내가 경과보고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잘못된 것 섭섭함만 꼬집어 말하게 된다. 사건의 억울함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한 부분, 군부 정부나 문민정부나 집권하면 뭐가 다른가?

이강두 의원과 김말용 의원은 추모사를 통해 한결같이 명예회복법 제정에 노력하겠다고 하였고. 김진석 총재는 고향의 불행한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해 달라고 추모객과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였다. 이날도 유족들이 수고를 많이 하여, 돼짓국을 끓이고 고기와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천여 추모객에게 점심 대접을 하였다. 준비와 뒤처리는 신원 유족들이 많은 수고를 하는데 서울·부산 기타지역 유족들은 명예회복을 위하여 열심히 뛰고 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특별법 제정을 위하여) (1)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을 강삼재 사무총장은 아버지라 부르며 자식과 같이 가깝다는 것이다. 날카로운 눈매, 칼날 같은 콧날,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실세란다. 14대 마지막 정기국회 회기 중인 19951012~14일 연 사흘간 국회의원회관 이강두 의원사무실에서 유족들이 진()을 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번 회기에는 특별법을 성사시킨다는 각오(覺悟)를 다쳤다. 김진석 신라 김 씨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도 연분(緣分)이 닫아 그분을 앞세워 유족 문병현, 문충현, 문철주, 문병언, 홍장희, 이철수, 나와 8명이 강삼재 사무총장을 면담하고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거창사건 특별법을 꼭 해결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이강두 의원이 많이 노력하고 있다. 민원인에 대한 상투적인 답변이다.

소수 유족으로는 안 되겠다는 결론으로 신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인원을 증원하기로 합의하고, 1117일 신원복지회관 2층에서 40여 명의 유족이 모여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홍보 부족 탓인지 유족이 많지 않았다. 회칙도 정하고 임원도 선출했다.

회장 문병현, 부회장 임호섭, 총무 조성제, 재무 이갑수, 재경회장 이철수, 총무 김운섭, 재부회장 윤성문, 총무 문홍두, 재경, 재부 회장 총무는 자동 이사가 된다.

선출된 임원들은 정기국회 회기 내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족들과 상호 연락을 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앞장선 유족은 적극적이었고, 미온적인 유족이 많았다. 1127일 신원, 부산, 서울 유족 7명이 국회에서 만나 김진석 신라 김 씨 총재와 김기배 내무위원장 방을 들어가니까, 데모하려고 온줄 알고 당황스러워했다.

우리의 법안이 내무위에 계류되어 있으므로 이번 회기에 심의를 부탁했고 관계자들과 논의 하겠다고 했다.

28일 국회의원회관 의원식당에서 평민당 정상용 의원과 장영달 의원을 만나 차를 나누며 협조 요청을 하였더니, 정상용 의원은 자기도 5·18 광주의 피해자라며 거창위령제 때도 여러 번 다녀왔다며 적극성을 보이는데, 장영달 의원은 지하에 수영장 겸 싸우나가 있는지 거기 간다며 자리를 피했다. 저런 자를 국회로 보낸 지역주민이 한심스러웠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