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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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한들신문
  • 승인 2020.06.2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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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 교사 백금대

오랜만에 걸려온 지인들의 전화가 반갑기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받기 망설여질 때가 있다. 경사스러운 일보다는 좋지 못한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점점 많아지고, 꼭 특별한 일이 아니더라도 세상살이에 지쳐 친구 목소리나 들으며, 시름을 덜어내기 위한 안부 전화가 태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숨부터 쉬고 전화를 받게 된다. 그래도 가끔은 경쾌한 카톡 소리에 전해오는 졸업생들의 안부 문자나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저희끼리 재잘거리는 소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찬, 학번과 이름이 뜨는 전화는 참으로 반갑고,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아이들과 이말 저말 주고받다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이야기들 속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로서는 낯설기 그지없고, 가끔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그때의 나는 먼저 태어나 조금 더 배웠을 뿐인데 아이들 앞에서 꽤 어른인 척, 세상의 면면을 다 아는 척 으스대며 위선을 떨었으리라. 소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소 그림만 애지중지하다 농부에게 망신을 당한 송나라 재상 마지절(馬知節) 이야기를 몇 번을 곱씹어야 번듯한 교사가 될 수 있을까?

교사의 지혜와 노력을 닮아 아이들이 바르고 곧게 자라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아이들을 양분으로 삼아 교사가 성장하는 아이러니하고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를 풀어야겠다. 그럴싸한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러 갔다가 동네 큰 어른의 훈수로 순식간에 내 이름이 바뀌었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소리 없는 눈물만 며칠을 흘리셨단다. 뭐가 그렇게 아쉬웠는지 지금까지도 바뀌기 전 이름의 끝 자를 따서 나를 부르시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남달랐던 이름 탓에 별명 부자로 살았으며, 이름보다는 번호가 익숙했던 학창 시절을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이름의 중요성에 매우 둔감해졌다.

시간이 흘러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새내기 교사의 때를 벗고 조금은 교사로서 정체성을 고민할 즘에 한 학생을 만났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듯하면서도 내 눈을 슬쩍 피하고, 질문에 입이 옴짝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물어보면 대답을 할 듯 말 듯 하면서 시선을 내리던 평범하게 보이는 아이였다. 그 이후에도 수업하는 동안 그 친구의 이름을 부르기를 몇 번……. 그리고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졸업식이 끝난 후 이쪽저쪽 불려 다니며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내 자리 위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서류, 아이들의 롤링페이퍼, 편지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졸업의 아쉬움을 달래며 아이들의 편지를 읽다 보니 낯선 이름의 쪽지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 짐작하고 있는, 그때 그 수줍음 많은 학생의 쪽지였다. 쪽지에 담겨있는 항상 조용히 지냈기에 수업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불린 적이 없었는데,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줘서 고마웠다라는 그 말. 길지 않는 그 말끝에, 그 수업이 생각났고, 그 친구의 표정이 생각났고, 아무런 의도 없이 무의미하게 그 친구의 이름을 불렀던 내가 생각났다. 나를 좋게 기억해준 그 아이에 대한 고마움보다 왠지 모를 부끄러운 마음에 몇 번이고 그 쪽지를 읽었다. 쪽지의 여백에는 그것이 고마움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 버린, 나는 참 못난 교사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익숙한 시 한 구절이 마음 한구석에서 맴돌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 수줍던 아이의 마지막 편지가 나를 크게 흔들었고, 나를 좀 더 나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완전하며, 나도 모르게 다른 누구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서 두렵다. 그런데도 이제는 좀 더 나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영양분이 될 수 있다는 바람과 희망을 품고서 또 하루를 시작한다.

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은 장난치듯 말한다. “선생님, 제 이름 모르죠?”

당연히 알지. 반드시 알겠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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