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②-개항과 거창 사회의 근대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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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②-개항과 거창 사회의 근대적 변화
  • 한들신문
  • 승인 2020.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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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조재원(역사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은 세도정치로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고, 밖으로 서양 열강이 중국에 침투해 오는 등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때였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치의 실권은 그의 부친 이하응[흥선대원군]이 장악하게 되었다[1863].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모순을 시정하고 부강한 왕조 국가를 중흥시키려고 정치·사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서원철폐, 양전사업, 경복궁 중건, 국방 강화, 내정개혁 등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강화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의 하나로 거창 지역도 18713월에 전국 서원 중에서 거창의 포충사 등 47개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였다. 18716월에는 거창 등의 군에도 별포군을 두었고, 동년 8월 삼가현에 포수를 설치하였다.

19세기 거창은 기존 지배 질서가 동요하는 가운데 양반이 중심이 된 상하 관계의 사회구조가 유지되었다. 거창의 정치질서는 거창도호부 관아가 정점이 되었다. 도호부사는 종3품으로 문관과 무관 또는 음직으로 부임하였다.

조선은 18762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내륙의 주요 도시에는 시장이 설치되었는데, 이들 개항장과 시장을 중심으로 근대의 신문물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정부는 개항 이후 부국강병을 목표로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외세의 침략을 수반하고 있어 많은 백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거창은 지리적으로 서부 경상남도의 내륙에 있는 탓에 새로운 문물의 도입이 개항장이나 시장과 같은 주변의 도시에 비해 지체되었다. 거창의 변화는 189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해는 청일 전쟁, 1894년 농민 전쟁, 갑오개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이듬해에는 행정 구역이 변경되었다. 1895년 지방 관제 개정으로 전국의 8도가 23부로 바뀌었다. 이에 조선 영조 대에 종삼품 부사가 다스리는 도호부가 되었던 거창부는 거창군이 되어 진주부에 소속되었다. 이로써 거창은 서북부 경상남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1년 후인 189623부가 폐지되고 전국에 13도가 설치되었다. 경상도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되었고 거창군과 안의군, 삼가군은 모두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조선 시대 거창읍에는 천내면 [지금의 거창읍 상림리 일대]의 중심지에 객사가 있고 그 오른쪽 앞에 거창도호부의 관아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시설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구축되었는데, 객사와 관아에서 영천 하천가로 이르는 대로변[지금의 아림로]과 영천변의 모래섬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거창 오일장은 합천, 함양, 산청 등의 장꾼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경상남도 서북부 지역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장터였다. 이 시기 거창의 도로는 전반적으로 임시 건물이라 좁았고 정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요 관공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초가 건물이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거창도 차츰 근대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는 도시의 외관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일상까지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의 철폐와 신교육의 실시 등으로 유생과 양반 가문은 비록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지주로서의 경제적 지위와 유교 문화를 보존하였다. 거창 지역도 조선 후기부터 은진 임 씨, 거창 신 씨, 초계 정 씨, 연안 이 씨 등의 가문들이 동성 반촌을 중심으로 한 촌락 사회에서 사회적 신분을 바탕으로 지위를 유지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거창 지역은 유교적 질서를 수호하고 전통사회 체제의 유지를 고수하는 보수적 유림들이 거주하였다. 이중에 사미헌 장복추는 1894년 농민 전쟁을 피해 거창의 가조 당동으로 이주하여 1900년에 숨졌다. 그는 영남의 삼징사로 불리는 당대 영남의 대표 유학자였다. 그가 이곳에 오자 지역 인사들은 크게 환영하였다. 그의 주위에는 지역 인물뿐만 아니라 삼남의 유학자들이 몰려들었고, 장복추는 그 문인들로 관선계를 조직하였다. 관선계 명단에는 윤주하, 변계석, 오종영 등 약 250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 말기의 학자. 순국 지사인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한 문인들 대다수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거창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개항 전후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둠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외세의 개입, 동학의 활동, 을사늑약으로 인한 국권 상실 등 감당키 어려운 시기였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활동하고, 물리력으로 왜적을 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조선 말기인 1872년 거창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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