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학살사건 특별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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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양민학살사건 특별 좌담회
  • 박재영 기자
  • 승인 2020.06.29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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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들 신문은 지난 20201월 돌아가신 김운섭 전 거창사건 유족회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 좌담회는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관련한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의 기고 이후인 2019921일에 진행했으며,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이번에 특별 기획으로 공개됨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519, 거창사건 배상법안이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며 주민들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다시금 주목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6·25 70주년으로,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청산 요구가 빗발치고 있어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들신문은 지난해 921,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의 기고를 통해 발제가 이루어진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다른 관점을 분석하고 향후 과제를 논의하기 위해 특별 좌담회를 했다. 이 좌담회에는 고()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이 참석했으며 정병문 한들신문 편집위원장이 사회를 맡았다.

왼쪽부터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고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정병문 편집위원장

전점석 선생님의 거창 양민학살사건 관련 연재가 지역의 소중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널리 공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다. 먼저 전점석 선생님께서 신문사 연재를 통해 발제하셨다. 연재 내용에 관해 설명해 달라.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저는 유족이나 당사자가 아니지만, 제삼자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글을 적었다.

6·25 전쟁 전후로 현대사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신원면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그런데, 거창에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관해 관심이 있는 시민들도 다른 지역의 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거창군지에는 2~3쪽에 걸쳐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나와 있는데, 함양군지나 산청군지에는 한 줄도 안 나와 있다. 공론화를 위해 작업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 글은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다. ‘5·16쿠데타박정희 대통령이 양민학살사건에 관련이 있는가를 보는 부분이다. 이해할 수 없는 국가폭력이 발생했는데, ‘, 이래서 말도 안 되는 학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6, 7, 8기가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됐다는 여러 논문을 보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제주 4·3 사건, 여수 항쟁을 묶었다. 지금까지 유족회에 계시는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족회가 한 조직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유족회끼리 만나지 않아 안타까워 글을 실었다.

세 번째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부 군인의 오판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 생각을 가지는 분이 거창에 계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대한 의견을 실었다.

네 번째는 신중목 국회의원의 폭로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보고서를 채택했다라며 공로를 인정하고 있는데, 사실 피해를 본 사람은 유족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 보고서에 의해 재판은 축소됐는데, 정부에서는 이미 거창사건은 종결됐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특히, 신중목 의원이 폭로한 공은 크지만 존경할만한 인물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거창사건 추모공원 역사관을 보면 거창 양민학살사건만 있다. 그 시절 전국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거창 추모공원 역사관에서는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산청과 함양의 역사관에는 전국의 학살지가 적혀 있다. 아주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함양.산청 추모공원 역사관 부조상에는 군인 세 명이 주범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권력자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 피해 본 시민이, 스스로 왜곡을 시키면 안 된다. 부조상을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주범이라는 설명만이라도 바꿔야 한다. 기고에서는 이런 취지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전반적인 말씀 해주셨다. 이어서 김운섭 고문님이 후배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이 평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유족회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경험과 입장에 대해 편하게 말씀을 해주시면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저는 이 사건을 잊으려고 88년도까지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살았다. 그런데 88년도에 월간조선에서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크게 났다. 신문에도 나고. 그래서 책을 사서 보고 글을 쓴 기자를 찾아가 나는 거창 양민학살사건 유족인데, 현장 생존자다라고 밝히며 상세히 설명했다.

그때 신원에 유족회가 있는지도 몰랐다. 당시 문병현 씨가 회장이셨는데, 성의 하나로 유족회 활동을 했다. 나는 서울에서 유족회 활동의 중간 역할을 했다. 거창 분들은 서울 지리를 잘 모르니까 국회 가려면 나를 만나서 가고 그랬다.

김동영 국회의원 계실 때 거창 양민학살사건 해결하겠다고 열심히 하셨는데 돌아가셨고, 이강두 국회의원과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법사위까지 올라갔는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법안이 폐기됐다.

신중목 국회의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도 최근에야 알았다. 공로비의 글을 제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 세웠는데, 지금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이야기를 듣고 공로비를 부수자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사실 유족회 이사들도 그 사건을 깊이 모른다. 군인이 총을 쏴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만 알지 법적인 부분이나 실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유족들이 잘 몰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우리는 산청과 함양 사람들을 미워했다. 거창사건 조사단이 구성됐을 때 산청 국회의원도 포함됐다. 그런데 산청 사건은 이야기를 안 했다. 그 이후 산청도 우리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라고 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전국에 사건이 많았다.

우리보다 먼저 일어났어야 했는데 가만히 있다가, 거창이 뭐가 된다고 하니까 우후죽순으로 나왔다. 우리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것도 좁은 소견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으면 같이 묶어서 하면 좋은데 안 받아들여졌다.

거창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 연도 미상.

정병문 편집위원장

그런 경험을 하셨고, 해결과 관련해 유족회 활동도 하셨다. 또 배상법 제정과 관련해 성명도 발표하셨는데, 지금까지 몇십 년 겪어오신 데 대한 소회나 느낌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전국에 이런 사건들이 많은데, 정부가 그 지역에 장학금 식으로 줘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소문도 들렸었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보상이 안 되면 안 된다고 했다. 개별보상을 받으려고 했는데, 우리 지역 강석진 국회의원이 힘이 없는가? 그대로 국회에서 계류되고 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달라고 안 하고 있으니까 특별법으로 제정해 국가가 잘못한 부분 짚어내고 대신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유족들이 지금까지 어렵게 살았는데, 이젠 밥 먹고 살 정도가 됐으니 돈 많이 주지 말고 정확하게 잘못 인정하고 그런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실질적으로 보상·배상이라는 게 돈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해서 잘 모르는 분들은 금전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유족회의 입장은 명예회복이 더 크다는 말씀이신 것 같다.

김영석 선생님께서 지역사뿐만 아니라 여러 흐름을 보셨을 텐데, 말씀하실 내용 있으면 말씀해 달라.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일제 강점기 가장 악독하다고 알려진 친일 경찰 노덕술이 거창경찰서를 거쳐 갔다고 한다. 거창은 일제 강점기 아래에서도 요시찰 지역이었다. 헌병대 분소가 거창에 있었는데 진주시까지 담당했다.

거창은 이념적으로 배운 사람들이 사회주의 계열로 물들 수밖에 없었고, 요시찰 지역이 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어 월북하다 보니 지역에 남은 사람 중 친일 부류가 많았다.

우리 지역에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무감각할 수밖에 없는 게, 이런 문제에 끼어들어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대한청년단 후예들이 6·25 이후 의용대로 빨치산을 토벌하는 권한이 있었는데, 횡포가 심했다. 그 사람들이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득세했다. 그런데 4년 전 의용대 총무를 했던 사람의 장례식 후 무덤에 말뚝이 박혀 있던 사건이 있었다. 아직 그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 걸 직접 눈으로 본 입장에서 지금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게 아직도 빠르다고 생각했다. 맺힌 게 많은데, 그분들의 응어리를 풀어주지 않고서는 어떤 일이든 백해무익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일제 강점기 36, 해방 후 70년 동안 보고 느낀 영향이 지금까지 지속해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관련해 선뜻 나서서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거창이 가진 한계이고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된 학살 당시의 모습을 담은 모형

정병문 편집위원장

좌담회를 진행하면서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지역의 정치·문화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 양민학살사건이 지역 정치의 보수성과 연관성은 없는지, 이런 부분들도 시사점을 얻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균형 잡힌 형태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논의해보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 말씀이 나온 것 같다.

해방 전후로 좌·우익의 대립 과정에 주요 인사들이 빠지고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라는 경험을 통해 모난 돌이 정 맞는정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지역의 주민이 정당한 주장이나 관(행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비민주적 정치 문화의 근원인 것 같다.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정의는 힘의 논리일 뿐, 진정한 정의는 아직 거론될 수 없는 지역이 거창이다. 저 자신이 피해 의식에 젖어있어서 하는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많이 느끼고 있다.

실제 우리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피해 지역인 신원은 이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명분 논리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고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 사건이다.

친일에 대한 재평가가 제대로 이뤄졌으면 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일 행적을 덮으려고 반공에서 승공으로, 다시 멸공으로 이어지듯이 빨갱이라는 논리가 먹혀들었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5.16 일어나고 바로 거창사건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아 비석을 정으로 깨고 다시 묻고 했던 부분은 바로 해방 이후 군부의 인적 구성과도 연결되어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어렵게 사시도록 김운섭 회장님을 그렇게 만든 원인이 일부 군인의 오판에 의한 게 아니라 그런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친일파가 반공을 외치고 연합세력을 형성해 이승만 대통령을 추대하면서 다른 여타의 좌·중도를 나쁜 사람으로 몰았다. 거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이 희생당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을 보면, 어느 이념을 갖고 있든지 독립에 도움이 된다면 다 만났다. 약산 김원봉이 좌익도 만나고 우익도 만났다. 이는 선택의 문제지 애국이나 매국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25를 거치며 멸공 분위기로 정치 권력이 득세하면서부터 빨갱이라는 말에 어마어마한 위력이 생겼다. 지금은 제주 4·3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면, 정치 이념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야 원한을 푸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친일의 맥이 튼튼하게 되어 있는 정치구조였다. 그게 온갖 일을 저질렀는데, 그중의 하나가 민간인 학살이었다. 최근 김원봉 서훈 이야기하니까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가 난리가 났다. 그들은 사실 가해자들이다. 친일파가 장악했던 초기 군부, 서북청년단이 다 나온다.

이런 데 대한 한들 신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에 말뚝이 박혔다는 이런 것을 사람들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해방 이후 기득권이 취약하다 보니 정통성을 가진 사람을 매수하거나 혹은 죽였다. 대표적인 게 경주지방에 있었던 사건이다. 자유당 집권하에 독립지사를 권총으로 죽였다.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방법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

6·25 동란이 끝나고 정리된 역사는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지 진정한 사실 기록은 없다. 거창의 경우 법원을 불태우고, 진주지원을 불태웠다. 재판 기록을 없애기 위해. 빨치산이 태운 게 아니고 지역민이 불태웠다고 한다.

특히 신원면도 역사 자료를 태운 게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하기보다 여기 있는 사람 중 행적을 감추기 위해 태운 게 많다고 한다. 신원이 호적이 없었고 남하도 없는데 법원이 불타니까 전체가 없어졌다. 신원은 호적을 구술해서 만들었다. 그 이전의 기록은 완전히 소멸했다.

오히려 친일 후손의 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한 게 아닌가 하는 견해까지 있다.

거창은 지역의 문중들이 힘을 모아 결의를 했는데, 행정체제가 바뀌면서 지역이 쪼개져서 모이는 기회를 분산시켰다. 일제가 조직개편이라고 하면서 예전부터 내려온 정신적인 동향을 파괴했다. 힘을 분산시킨 것이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연재를 주제로 했는데, 말씀을 나누다 보니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불행이지만 역사의 흐름이었다는 생각이다.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지만, 공식적인 문건에서는 거창사건으로 불린다. 역사적인 내용의 명칭을 하나의 지역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국가에서 저지른 잘못을 부인하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거창사건이라고 하는 불편한 내용에 대한 이름을 짓는 게 필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신원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가면 한쪽은 거창사건이고 한쪽은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라고 적혀 있다. 거창사건은 거창사건 사업소에서 붙인 것이고, 하나는 유족회에서 붙인 것이다.

공무원에게 왜 거창사건이냐? 양민학살사건이지라고 했더니 내막에 대해서는 자기들도 모른다고 했다. ‘거창 신원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사건인데 왜 양민학살사건이 아니냐고 했더니 국가에서는 양민을 학살할 수 없다고 한다. 거창사건이라고 하면 거창에서 매년 벌어지는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닌데, 거창 양민학살사건은 하나밖에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 간판은 안 바뀌었다.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설치된 학살 당시의 모습을 담은 모형

정병문 편집위원장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나름대로 역사적인 관계를 잘 반영했는데, 거창군청 누리집에는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고 되어 있다. 특별조치법에도 공비 토벌 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라고 되어 있다.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향후 과제에 대한 의견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해방기 동안 있었던 거창 지역의 친일 청산 문제, 그리고 신원 이외의 민간인 학살 문제다. 이게 서로 엉켜져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게 다 밝혀져야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거창 유족회의 몫인데, 경남 유족회에서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국에서 거창 유족회가 제일 앞서 나갔다. 법도 만들고 투쟁도 하고 여의도도 많이 가고. 고생 많이 하셨다. 이제 후배 유족회를 이끌어줄 책임이 있다. 그동안 거창 유족회는 다른 유족회가 모이는 경남 유족회에 결합을 안 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평화인권제다. 거창에서는 매년 평화인권제를 해왔고 한때는 거창 유족회와 공동으로 같이 했다. 이런 평화인권제를 통해 해원과 상생과 화해와 평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희생자의 명예회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마산 창원 이쪽은 김경수 지사 들어서고 확 바뀌었다. 거창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마음이 풀린다.

네 번째는 구술 자료집이 나와야 한다. 거창군에서 비용을 받아야 한다. 유족들의 한 분 한 분 사연이 거의 책 한 권이 된다. 그분들 돌아가시기 전에 구술집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지역은 구술집 많이 만들었다. 전집으로 나온다. 그 일에 거창군에서 신경을 써야 한다. 국가기록원에 보관할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필요하다고 문제 제기를 지역 언론에서 할 필요가 있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구술자료를 포함해서 제안까지 해주시니까 지역 언론 하는 처지에서 충분히 반영해 지역민들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정리 말씀을 부탁드려야 할 시간인 것 같다. 거창 유족회에 대해 당부하시는 말씀이 들어 있으니 그런 부분들에 대해 말씀해 달라.

 

() 김운섭 거창사건 유족회 고문

저는 전부 다 참여하고 협력하고 싶다. 그런데 유족들이 사람이 참 없다. 희생자는 많은데 적극적으로 나설 사람이 없다. 유족이 2, 3세다 보니 직접 유족이 별로 없다. 관심이 없다. 뒤에 따라오고 협조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하다가 포기해버리고 이런 식이다.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하고 싶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김영석 선생님도 지역 문제와 관련해 마지막 말씀 부탁드린다.

 

김영석 거창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거창군청 공무원이나 신원면 사무소 직원들이 전혀 관심이 없고 모르고 있다. 공무원 인사를 2년마다 하니까 전문성이 빠져 있다. 유족회나 한들신문 등 의식 있는 단체에서 그러한 안을 만들어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공무원이 관심을 두고 일을 하는 것과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에 차이는 크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특히, 우리 지역 문제를 같이 논의할 때 공무원을 배척하지 말고 같이 끼워 학습해야 한다. 그런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몇 사람 참여를 안 한다고 하더라도 한들신문이든 민간단체든 유족회든 그런 것을 요구해서 우리가 우리를 홍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니까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한 사람이 미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계속 담당 공무원 괴롭히고 특히 지금은 군수님이 신원 분이다 보니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정병문 편집위원장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시간이 모자란 것 같다. 하실 말씀도 많고 회장님도 사실 나누고 싶은 이야기 많으실 것 같다. 하지만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은 공유된 것 같다.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린다. 평소 가진 생각이나 공유하고 싶었던 가치들이 이 속에서 표현돼 독자들이 지역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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