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④-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외세에 대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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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④-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외세에 대한 저항
  • 한들신문
  • 승인 2020.08.3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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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지역 농민군의 봉기와 ‘양반’ 지배층의 토벌

18949월 중순 구국항일 투쟁을 위해 동학교도들이 봉기할 때 서부경남 지역에서도 이와 연대하여 동학군의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는 대구 판관 지석영을 영남 토포사로 삼아 낙동강 좌우지역의 동학교도를 토벌케 하였고, 거창부사 정관섭으로 하여금 경상좌도 소모사를 겸해 거창·안의·함양·산청·단성·삼가·합천·지례·진주·하동·의령·남해의 12개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411월에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남 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곤양의 금오산과 하동의 고성산성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1개 중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이 전투 이후 서부 경남 지역 동학 농민군은 크게 세력을 잃었지만 지리산을 배경으로 끊임없는 저항을 이어갔으며, 다음 해 을미의병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18941214일에는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거창으로 향한다는 첩보에 따라, 경상 감사 조병호가 영관 최처규에게 관군 100여 명을 인솔하고 고령(19합천(20거창(21-23고령(24)을 순회하도록 하였다.

1894년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일본군 후비보병 제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1894) 일청교전 종군일지에 의하면 189412월 일본군 보병 제18대대가 경상도로 진입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1216일에 경상도 상주목의 서기관 박용래를 체포해서 고문한 끝에 관직을 박탈한 뒤 추방했으며, 18일 개령의 관리들 수십 명을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모두 총살했고, 19일 김천에서 농민 10명을 죽이고, 23일엔 경남 거창의 촌락을 수색해 8명을 체포해서 총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과 관군은 12월 초 전라도 무주와 경상도 진주에서 거창으로 들어오려는 농민군을 막아냈으며, 일본군은 18951월 상순 거창지역에서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농민군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자 양반 지배층은 민보군을 결성해 농민군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민보군의 활동은 농민군이 패산한 경내에 구질서를 회복하고 농민군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동학에 가담한 농민군을 귀화하는 한편 접주 등의 농민군 지도자를 색출하여 처형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거창의 향촌 사림들은 거창읍 망덕산에 성을 쌓고,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여 민보군을 조직하고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거창 가조 출신 김시후의 갑오실기에 의하면 1894715일 거창에서는 동학농민군 수십 명이 말을 타거나 도보로 이동하여 거창부 관아에 진입하였다. 당시 거창부사 남정헌은 크게 겁을 내며 제압할 바를 몰랐고, 아전 두 사람이 소문을 듣고는 곧바로 그 사람들을 통솔해 무기를 갖고 뛰어 들어가 16명을 죽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망갈 무렵에, 부사 남정헌은 임기가 다하여 귀환하게 되자 관아는 비워져 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위태로움에 떨었다고 한다.

김시후의 『갑오실기』 - 구한말 거창 지역 동학농민전쟁의 기록이다
김시후의 『갑오실기』 - 구한말 거창 지역 동학농민전쟁의 기록이다

이에, 향중(유향소의 임원)이 일제히 모여 이준학으로 3면의 도통으로 삼아 먼저 부사에 도소를 설치하고, 아전으로 좌우부장으로 삼아 방어하는 방책을 마련하였다. 새로 부임한 거창부사 정관섭은 동학농민군이 길을 막아 도보로 간신히 관아에 도착하여 이준학으로 거창부의 도통수로 삼고, 면마다 1명의 통수와 마을마다 1명의 통수를 세우고, 또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대비했고, 경내에서 동학교도로 의심을 받는 사람을 조사하여 찾아냈다.

거창 동학 농민전쟁 참여자 추모제 (2019)
거창 동학 농민전쟁 참여자 추모제 (2019)

현재까지 추적된 거창지역 동학 농민군 의 지도자는 가조면 석강리 출신의 이익수(1856~1894)로 알려져 있다. 이익수는 일찍이 안의에 사는 처족의 인척에게 동학을 전도받아 포교활동을 하였고, 가조와 가북을 중심으로 거창 각처에서 운집한 수백 명의 농민군을 지휘하여 거창으로 넘어와 관군과 전투를 치렀으나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비로 전과도 거두지 못하고 패전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이익수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농민 군이 체포되어 18941016일 거창 영천에서 공개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밖에 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가 양반들이 조직한 민보군에게 피살된 인물로 강기만, 오성서가 있으며, 김성지(1853~1935)189412월 초순 경 전북 장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놓인 동학농민군 150여 명의 결박을 풀어주고 거창으로 피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농민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매우 컸다. 농민군의 재산은 모두 관리의 재산이 되고 가옥은 모두 불탔으며 기타 부녀자 강탈, 능욕 등은 차마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피해는 전라도, 충청도와 함께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등지에서 매우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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