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⑤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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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⑤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0.09.2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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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의 시작과 노응규 의병부대

구한말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어 감에 따라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이 대두되었다. 한말 의병전쟁은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1915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을미의병은 189510월 일제의 만행으로 저질러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그 해 11월에 공포된 단발령 [1895년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1886년 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의병 봉기를 주도한 세력은 개항 전후부터 줄곧 위정척사[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면서 내세운 말] 운동을 펼쳐온 지방의 유생들이었다. 당시 의병이 봉기하였거나 의병항쟁이 활발하였던 지역은 대체로 경기의 광주와 양근 일대, 강원도의 춘천, 충청북도의 제천·충주, 경상북도의 안동, 전라남도의 나주 등이다. 의병항쟁의 중심지였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 지역은 모두가 유림의 근거지이거나 양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거창을 포함한 경남 지역에서는 진주가 의병운동의 중심지였고, 이 진주 의병의 여파가 김해 등에까지 미치는 수준이었다. 진주 의병의 핵심 인물은 노응규이다. 진주 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과 마찬가지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에 의해 촉발되어 그 이듬해인 1896217일에 노응규에 의해 안의 [당시의 안의는 거창과 함양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단일 행정구역이었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노응규는 1861년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쾌암에서 시골 선비 노이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안의로 이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는 영남의 유학자 성재 허전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다가 30세 전후에는 전국 유림의 영수 격으로 19066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을 사사하였으며, 또 뒷날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순절한 충남 은진의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도 출입하는 등 한말의 전형적인 척사파 유생이었다.

노응규는 덕유산 기슭에 위치한 장수사의 승려 서재기를 비롯하여 정도현, 박준필, 최두원 등 안의 출신인 그의 문인과 그 외에 임경희, 성경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는 서재기를 선봉장에 임명하는 등 의병진을 편성하고 그 날로 진주로 진격하였다. 진주향교에서 공격의 기회를 살핀 노응규 의병진은 220일 새벽에 순식간에 진주성을 점령하고, 곧이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노응규 의병부대가 진주성을 점령하자 이 지역의 정한용과 오종근 등이 봉기하여 성 밖에 진을 치고 합세하였다. 여기에는 호남의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합천 쌍백의 이름난 선비인 애산 정재규와 같은 인물도 가세하였다. 노응규는 성안에 초현관을 임시로 설치하고 인근에 방문을 내걸고 동조세력을 규합하였다. 그는 의병 초모를 위해 각 면, 리에 전령을 보내 매 2호당 군사 1명씩을 내게 하였다.

노응규 의병부대의 주둔지 터 (경남 진주시 진주성내 선화당 터)
노응규 의병부대의 주둔지 터 (경남 진주시 진주성내 선화당 터)

 

이와 같이 부대를 정비하고 있을 때 달아났던 관찰사 조병필이 대구부의 관군과 함께 반격해 왔으나, 의병진은 이들과 두 차례에 걸쳐 접전하여 참서관 오현익 등 수 명의 관리를 처단하였다. 관군을 격퇴하고 사기가 오른 노응규 의병부대는 마침내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던 중 함안을 거쳐 김해평야에 이르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 출신의 이청로 부대도 합세하였다.

노응규 등이 진주성으로 되돌아온 후 관군의 이간책으로 토착세력인 정한용이 배신하고 말았다. 그 결과 노응규 등은 관군에 진주성을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때 다수의 의병과 함께 안의로 옮아갔던 선봉장 서재기는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진주성을 가까스로 탈출한 노응규는 잔여 의병을 거느리고 합천 삼가로 이진해 있던 정한용과 합류하기 위해 삼가로 향했으나, 정한용은 그가 미쳐 당도하기 전에 의진을 해산하고 말았다. 결국 노응규는 봉기 2개월여 만에 의진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그는 안의의 서리들에 의해 부친과 친형이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이후 1902년 규장각 주사에 배임되어 벼슬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중추원 의관, 동궁 시종관 등의 관직을 겸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간 이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재기 항전의 기회를 엿보던 중 19066월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이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의 거의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단 한 차례 정부군의 공격으로 무너지자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 봉기를 모색하였다.

190611월 충북 영동 황간에서 다시 봉기하였다. 그가 봉기한 황간은 충청, 경상, 전라 3도의 분기점인 소백산맥의 줄기로 지세가 험한 곳으로 산악을 배경으로 한 유격전의 전개에 유리한 곳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창녕·초계의 문인들과 안의·거창 등지의 우국 청년, 황간 상촌면 청년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의 황간 의병은 화기류를 수집 제조하여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노응규는 일제의 시설물 및 철도·열차를 그 주요 파괴 대상으로 삼는 한편, 일본군과도 교전을 벌여 섬멸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문태수, 이장춘 등의 덕유산 의병부대와 합동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121일 충북 청산 경무 분서 소속의 순검들이 노응규 의병부대의 장령들을 체포함으로써 노응규의 황간 의병은 자연 해산되고 말았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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