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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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세계
  • 한들신문
  • 승인 2020.09.2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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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뾰족하게 갈아 창을 만들고 키보다 더 높은 사바나의 평원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앞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우리는 긴장할 것이다. 적 또는 짐승인가? 동료인가?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면 훨씬 우리의 생존에 유리하다. 그렇지 않고 다양한 소리의 원인을 생각하고 방심한다면 단 한 번의 실수로 적대 부족의 창에 목숨을 잃거나 짐승의 공격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인간은 왜 모든 것을 두 부류로 나누는가에 대한 진화론의 답변이다. 우스개 소리로 인간은 모든 것을 두 부류로 나누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인간은 진화를 해왔고 그 방식 가운데 하나가 모르는 대상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 외는 모두 적이라 규정했을 때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고 적이라 판단했을 때 공격과 방어를 바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진화는 뇌 용적이 커지는 방식으로도 진행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 용적은 650~750cc 정도이지만 호모 에렉투스에 이르면 두개골의 용적은 1000cc 정도로 늘어나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뇌 용적은 1,450cc에 이른다.

뇌 용적이 늘어나는 것은 곧 전두엽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두엽의 확장은 이성의 지평이 더 넓어졌다는 것이고 이성의 확대는 대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사회의 규모와 정비례하는 데 사회의 크기가 커지면서 선택압으로 뇌가 따라 커진 것인지 아니면 뇌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사회의 크기가 따라 큰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뇌의 크기와 사회의 크기는 같은 방향으로 변화했다. 씨족사회에서는 적과 동지의 이분법이 가능하지만 부족사회로만 발전해도 수많은 관계의 경우의 수가 생기는 탓에 적과 동지의 두 관계만으로는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해진다.

예수를 신봉하다 본인과 예수 사이를 혼동하는 전광훈 씨가 광복절 집회를 광화문에서 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이러스를 비웃으며 동지를 규합하여 주적인 문재인을 타도하자고 일갈했다. 그의 머릿속은 국민도 없고 법도 없으며 과학, 심지어는 성경조차 없다. 오로지 우리와 적만이 존재하고 있다. 확진자들이 모여 집회를 연다는 것은 테러 행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호모 에렉투스의 뇌 용적만 되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그들은 무시하다 결국은 또 한 사람의 확진자가 되었다. 기적이 일어나기에 바이러스가 너무 작았는지 모른다.

윤석열이라는 검찰총장이 있다. 이 사람과 소속 집단 검찰의 범죄관은 아주 독특하며 단순하다. 범죄에 있어서 인간은 두 부류이며 한 부류인 거의 모든 인간은 범죄를 저지르지만 다른 부류의 인간인 검찰은 범죄를 단죄한다는 인식이다. 검찰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며 설령 죄를 짓는다 해도 그것은 피치 못할 실수에 불과하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들이다. 일반인들의 형사 사건 기소율은 34.2%인데 검사의 기소율은 0.2% 에 불과하다. 검사는 결코 인간계의 생물이 아니다. 윤석열 본인도 아내와 장모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천사의 가족은 또 다른 천사 아닌가.

조선·중앙·동아일보를 한국의 대표 언론이라고 한다. 그 영향력이 수많은 다른 언론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 세 곳 수구 언론의 세계관도 극단적 두 진영 나누기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은 빨갱이로 불리는 소멸해야 할 친북 진보세력과 융성하고 발전해야 할 자신들의 수구세력이 그것이다. 우스운 것은 그들의 세계관은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미워하는 진보세력들의 세계관을 도용했다는 것이다. 빨갱이의 수괴 마르크스가 적대적 모순이라 불렀던 자본가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갈등과 그 해소 방법을 결과만 바꿔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다른 생각을 화형 시켰던 기독교 광신 세력은 서구에서 사라졌다. 진실은 불에 타지 않는다. 모든 세력의 정점에서 반역과 음모로 권력을 유지하는 검찰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유일함도 공수처를 필두로 이제는 끝나간다. 진보가 소멸하고 없는 독재국가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언론을 없애는 것이다. 독재로 회귀해도 수구신문은 목숨을 다할 것이고 가장 유력한 가설이지만 시민이 각성해도 그 신문은 역사 속에 묻힐 것이다.

우리가 철들었다’, ‘어른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적대하는 두 세력이 끝없이 투쟁하는 광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붙이는 형용사다. 사바나에서 배부른 사자는 결코 영양을 죽이지 않는다. 영양이 사라지면 사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빨갱이가 사라지자 결국은 히틀러도 사라졌고 부르주아가 사라지자 러시아 공산당도 소멸했다. 적대적 관계에 기생하는 수구언론도 언젠가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데 아직도 씨족사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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