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노응규의 진주 의병이 해산된 이후 의병전쟁이 다시 일어난 것은 「제2차 한·일 협약 (을사보호조약)」 의 체결 한참 이후의 일이다. 거창을 포함한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전쟁은 덕유산과 지리산을 배경으로 유격전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의병전쟁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서부 경남지역에서 의병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이후였다.
이 시기 서부 경남지역에서 의병전쟁의 선구적 역할을 한 대표적 인물은 의병장 김동신과 고광순이었다. 의병장 김동신은 1906년 3월 26일 홍주에서 기병한 민종식의 부하로 들어가 그 선봉장이 되었다. 김동신은 민종식에게 전라남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한 후 약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무주군 덕유산에 있는 자원암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 하면서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먼저 홍주에서 기병하였지만 그 후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김동신은 전라남북도를 잠행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갔다. 군대해산 후 의병운동이 보다 심화되어 가자 김동신은 전북 정읍군 내장산 백양사에서 기우만·고광순과 더불어 기병할 것을 의논하고 인근으로 통문을 돌려 의병을 소모하고 군기를 모아 갔다.
양력 9월 10일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순창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 고문 분파소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관물을 노획하였다. 김동신의 순창 거의는 이해 9월 15일 고광순의 동복 순사 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해산 후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 있어서의 의병 봉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1907년 8월 4일(음)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 사장에서 일본군과 격전하여 2명을 사살하고 큰 피해를 주었다. 8월 11일 고광순 의병부대와 더불어 응령에서 공격할 것을 약속하고 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당도하니 그 지역은 천혜의 험지로서 군사를 머무르고 군세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군기를 세웠다. 기에는 '머지않아서 국가를 회복한다'라는 뜻으로 '불원복'이라는 3글자를 썼다. 그리고 6시경에는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구례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군경을 격퇴시킨 후 이곳 군기를 노획하였다. 이즈음 이들이 문수암을 거점으로 하였기 때문에 9월 18일 일본군들이 문수암을 불태웠다.
8월 17일 오전에 약 8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함양군 좌전에서 일본 군경 20여 명과 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주었다. 9월 4일 의병 6백 명을 거느리고 경남 안의군 월성(현재의 거창군 북상면)에서 일본군 40명을 공격하였고, 1908년 2월 약 1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용담군 구랑 일대에서 교전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전북 무주군 황천면 삼곡리에서 일본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3월 6일 스스로 ‘3남 의병대장’이라 칭하고 8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남 거창군 고제면 매학 일대에서 일본군 70여 명과 교전하였다.
이와 같이 전라·경상도 일대에의 종횡무진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중 뜻하지 않게 신병이 발병하여 남몰래 충남 회덕군 탄동면 덕진동에서 치료하다가 대전경찰서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6월 8일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후에도 그의 부하 비장들은 계속해서 전북 무주, 경북 성주, 경남 거창, 전북 순창, 전남 담양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와 함께 거의하여 선봉장으로서 활약하던 유종환·문태익·최정근·성문길·차은표·오대근·국인묵·임병주 등을 들 수 있다.
경남 하동의 화개면 의신 마을에는 ‘거창 의병’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주인공들은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한 거창 지역 의병들로 1908년 1월 말 의신마을에 의병 50여 명이 음력설을 지내려고 내려왔다가, 1908년 2월 2일 의병탄압에 나선 일본군 함양 수비대의 지리산 토벌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 참여한 의병은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대의 일부가 참여한 의병이었다.
일본은 군경 합동 토벌작전으로 의신마을 의병을 공격하였다. 1908년 2월 1일부터 다음날까지 거창경찰 분서 함양 출장처 가와하라 특무 조장 이하 15명의 일본군이 파견되어 의신마을 의병과 전투를 벌였다. 2월 2일 의신마을에서는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로 인해 15~20여 명이 사망하였고, 1명이 포로로 잡혔다.
또 같은 달 3일부터 5일까지 전라도 남원·구례 수비대의 일본군과 순천 주재소 순사 등의 합동 토벌대 50여 명이, 같은 달 7일부터 11일에는 경상도 진주·하동 수비대의 일본군과 순사 등이 3개 부대로 편성되어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하동군 일대에서 의병 토벌작전을 벌였다.
▶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