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⑦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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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⑦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0.12.0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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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이후 거창의 의병전쟁과 문태수 의병부대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대한제국은 1905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어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의 체결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전쟁을 재개하였고, 특히 대한제국의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호남에서 기병한 김동신 의병부대와 고광순 의병부대가 거창을 포함한 서부 경남 일대에서 지리산을 배경으로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이후, 1908년 초 문태수가 그들의 뒤를 이어 이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문태수는 경남 함양군 출신으로 1906년 봄 무렵 덕유산 일대에서 동지들을 모으고 산포수를 규합하여 고향 마을 부근에 있던 영각사에서 창의 하였다. 창의 후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전열을 정비하여 곧 무주군 안성의 원통사로 이동하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항일전에 들어갔다. 안성으로 의병부대를 옮긴 직후, 일본군 5명이 용담으로부터 무주읍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길목인 안성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주막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소지한 총기를 한 곳에 모아놓자, 농군으로 가장한 의병들은 총기를 수거하고 이들을 현장에서 전원 사살하였다. 이와 같이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함으로써 명성이 원근에 자자하게 되었다.

문태수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원통사 (전북 무주군 안성면)
문태수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원통사 (전북 무주군 안성면)

 

19069월 용장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떨칠 수 있었다. 이후 박춘실은 선봉장으로 활동하였고, 인근 각처로부터 의병이 많이 모여들어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9월 하순 장수읍으로 들어가 그곳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어 일본군의 출동을 예상하고 신속히 계북 방면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배치하는 등 그 대비책을 세웠다. 곧이어 인근 수비대로부터 출동한 일본군을 맞아 농소·어전·문성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5명을 사살하고 20여 명을 부상 입히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처럼 연승을 거둔 뒤 무주군 구천동의 덕유산으로 행군하였다. 이 무렵 전성범을 맞아 중군장으로 삼고 부대를 합침으로써 더 강한 군세를 갖추게 되었다.

1907년 초 구천동의 근거지를 후군장 신탁광에게 맡긴 뒤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무주군 부남면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설을 보냈다. 이때 일본군이 출동하자, 일본군을 기습하기에 유리한 부남면 고창곡에 의병을 매복한 후 유인하였다. 중군장 전성범의 지휘 하에 협곡에 잠복해 있던 의병은 일본군을 향해 일제히 공격하였다. 동시에 전·후방으로부터 선봉장 박춘실이 지휘하는 의병도 일본군을 향해 사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일본군 43명을 사살하였다고 전해질만큼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수차의 항일전에서 연승을 거두게 되자 그 명성이 전국으로 퍼져갔다. 이에 따라 휘하에 들어오는 의병 수도 계속 늘어났다. 고창곡 승전 후 원통사로 이동하였을 때 의병에 지원해온 자가 200명에 이르렀을 정도였고, 강원 원주에서 활동하던 이병렬은 명성을 듣고 온 경우였다.

이후 경남의 함양·거창, 전북의 장수·무주·진안·임실, 충남의 금산 등지를 오가며 덕유산과 적상산·성수산 등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60여 회에 걸쳐 일제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가운데서도 1907107일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함양 안의의 장수사에서 일제 군경 30여 명과 교전을 벌여 전멸시켰던 장수사 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907년 말 전국 의병의 연합체로 13 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어 서울 진공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경기 양주로 집결할 때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북상하였다. 중부지방에서 활동하던 허위·이인영·이은찬 등의 의병장을 주축으로 전국 의병을 통합하여 단일 군단으로 편성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시켜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13 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인영은 허위와 상의한 뒤 1907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부대를 통일하여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덕유산의 근거지를 박춘실과 전성범에게 맡겨놓고 정예병 100명을 거느리고 예정된 집결지인 경기 양주를 향해 북상하여 호남의병대장의 명의로 연합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이때 전국 각지로부터 양주에 집결하기로 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양주로 집결 중이던 각 의병부대는 회의를 통해 13 도창의대진소의 총대장으로 이인영을 추대한 뒤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연합부대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여러 가지로 전력상 한계가 많았다. 사전에 정보가 노출된 상태였고 지휘 계통을 세우기에 난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허위가 거느리는 300명의 별동대는 19081월 말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기도 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고 말았다.

1908년 초, 서울 진공작전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고 덕유산으로 귀환한 이후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의병전쟁을 재개하였다.

1908228, 이종성을 선봉장으로 삼아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제의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무주 외곽에 주둔 중이던 일제 군경의 거센 반격으로 의병부대가 패배하면서 체포되었으나,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무주에서 퇴각하여 인근 부대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의병전쟁을 지속하였다. 이때 연합한 대표적 의병부대 가운데 하나가 신명선 의병장이 이끌던 부대였다. 1908410일 신명선 부대와 합동으로 15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장수를 습격하여 일제 주재소와 관공서 등을 유린한 뒤 무주 방면으로 철수하였고 이후 일제 군경의 탄압이 집중되자, 이를 피해 무주·장수·거창·함양 등지를 무대로 소부대로 분산하여 산발적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문태수 의병장의 체포지 영각사(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문태수 의병장의 체포지 영각사(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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