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⑧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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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⑧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0.12.2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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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과 덕유산 의병의 활동 : 월성의병

1905년 이후 거창을 포함한 서부 경남에서도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동시에 전국의 의병이 덕유산으로 이동해왔다. 덕유산 자락에서 활약한 의진은 무주 출신을 비롯하여 당시 경남의 거창·안의, 경북의 대덕·지례, 전북의 금산·용담·장수, 충북의 영동·황간 등지로부터 온 의병들로 구성되었다. 덕유산 의병의 활동은 1907~1908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덕유산 의병의 대표적인 인물은 앞서 소개한 김동신과 문태수였다.

거창지역에서는 북상의 월성의병과 고제의 오진사 의병부대 등 지역의병과 인근 덕유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의병부대들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거창지역과 덕유산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월성의병 은 1905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에서 오일선을 중심으로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 등 40여 명이 월성 서당에 모여 봉기를 결의하게 되었다. 도총, 유격, 후군, 군수, 정보 등의 부서를 편성하여 부대의 이름을 월성의병이라 하였다. 본부는 김현일의 사랑채에 설치하여 작전 지휘를 하였다.

이들은 경원탁, 이규현, 문언조, 안진태, 고제두, 신병삼 등을 각 연고지에 파견하여 병력, 군수, 정보에 관한 강력한 전투체제를 갖추었다.

월성 서당 터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 서당 터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유격장 하거명, 아장 박화기는 유춘일, 김권원, 박수기, 임구희, 하일청, 김영삼, 임찬일, 김일종,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순집, 이순갑 등을 인솔하여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며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그 암호는 베 짜는 북을 가는 소리로 하였다. 또한 길옆에 표식을 비치하거나 철거하는 방법으로 행동을 신속 민활하게 하여 일본군의 허점을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후군장 김성진은 박민기, 조두식, 신성규, 이규일, 김영조, 장춘기, 송군필 등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전방과 호응하여 임기응변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수 감 김현수는 김환제, 이준호, 임필희, 조성필, 서환식, 김군백, 조성목 등에게 군량과 무기 탄약 등을 수집, 제조 조달케 하였다.

정보 이석길은 마을 앞에 주막을 차려 왕래하는 사람들을 살피며 정수경, 이순진으로 하여금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월성의병은 1906년 문태수가 이끄는 호서의병과 제휴하여 싸우기도 하고, 덕유산 의병 2백여 명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개 나기수, 오지선, 이인호의 책임하에 후군이 담당하였다.

특히 한학자 임필희는 경리참모로서 군자금 헌납에 앞장을 섰는가 하면 스스로 20냥의 자금을 헌납하여 의병들의 사기 진작에 노력했다.

19069월에는 호서의병과 연합하여 장수 전투에서 일본군 10명을 사살하였고, 무주 고창곡에서도 수십 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1907년에는 거창읍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였으나 임구희가 전사하였다.

1908년 무주 구천동, 삿갓골 두 전투에서 호서의병 및 덕유산 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1909년 전북 장수군 계북 전투에서 유춘일이 전사하고, 박화기는 총상을 입어 함께 참여한 동생 박수기의 부축으로 귀가하였으나 일제의 정탐꾼 최고미의 밀고로 두 형제는 전북 무주 수비대에 피체되어 폭도혐의로 104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에서 순국하였다. 최고미의 밀고는 계속되어 127일 하일청이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월성의병 사적비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의병 사적비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이에 불안과 분노에 찬 동민들은 최고미를 찾아내어 남산 벌판에서 처단하였다. 그 직후 일본 군경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 놓고 가혹하게 심문하였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는 자신이 한 단독 소행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다. 그는 피체되어 1912928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0한일합병 (경술국치)이후에도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응삼은 10년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김군백은 진주 감옥에서 5년을, 임찬일, 김일종은 진주 감옥에서 5년의 형을 치렀다. 강옥성, 박문규, 박정규, 조성목은 심한 고문 끝에 석방되었으며, 조순집, 이순갑은 일생을 방랑하였고, 김성진은 잡혀가는 도중에 탈출하였으며, 오일선은 의사로 위장하여 피신하였다. 현재는 박화기, 박수기, 박민기 세 사람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참고문헌
1. 이태룡, 『무주 덕유산 의병』, (2013년) 
2. 거창군, 거창문화원, 『거창군사 보정자료』, (거창군, 2009) 96쪽~99쪽
3.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개인 연구자료)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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