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말 의병장 은표(隱豹) 차성충(車星忠)의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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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말 의병장 은표(隱豹) 차성충(車星忠)의 의병활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01.2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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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부대의 위용
의병부대의 위용

 

가조역사연구소장 김영석
가조역사연구소장 김영석

차성충(車星忠)1859. ~ 1905. 05.

차성충 의병장은 거창 출신으로 호는 은표(恩豹)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안동의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서울의 김현준(金顯峻), 거창의 은표(隱豹) 차성충(車星忠), 영춘의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 등과 연계하여 의병항쟁을 도모하였다.

190511월 김현준, 차성충과 함께 김천에 머물면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고, 12월 김현준은 순흥에 사는 김교림(金敎林)을 찾아가 거의(擧義)를 논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거의(擧義)에 대해 논의하였다.

 

19079월 전북 순창(淳昌)에서 기의(起義)한 김동신(金東臣) 의병장의 비장(裨將)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190868일 김동신이 피체된 이후부터는 비장 출신 성문길(成文吉)과 함께 5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경부 성주(星州) 지방에서 크게 활약하다.

 

19081월 석주 이상룡이 1만 민금(緡金)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이에 이규명은 그다음 날 맏아들 지선(芝璇)과 사위 이세형(李世衡)을 보내어 거창의 차성충 집에 전하였다. 차성충은 가조 산속에 병정을 모으고 무기를 마련하여, 일제와의 항전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도리어 일본군에게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기를 빼앗기고, 병정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도 이규명은 차성충, 김상태 등과 꾸준히 연계하여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092월 은표(隱豹)의 거의(擧義) 준비가 두서가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풍기에 있는 여수천(呂壽天)의 집으로 은표를 찾아갔다. 김심연(金心淵), 은표와 함께 며칠을 유숙하고 돌아왔다. 대장(大將)에 등단하는 날은 이번 달 20일이다.

3. 은표(隱豹가 순흥 산중에 살면서 모집한 병사 수백 명이 각자 병장기를 가지고 모였다. 은표를 대장으로 삼고, 김상태(金尙台)를 중군(中軍)으로 삼았다. 군졸이 부족했기 때문에 산속에 진영을 머물러 두고, 군졸을 나누어 보내 경내(境內)로 들어오는 적을 막아냈다.

은표가 병사를 풍기, 순흥, 영주 등지로 나누어 보내 전후로 사살한 왜적이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4. 은표(隱豹)와 중군(中軍) 사이에 틈이 있어, 서로 중상(中傷)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병사(兵事)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김심연(金心淵)이 순흥으로부터 와서 여러 달 머물렀다. 고개(竹嶺)를 넘어온 사람들이 은표에게 기호 진영에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뜻을 청하였다.

5. 왜병들이 갑자기 한밤에 들이닥쳐 은표(隱豹)를 살해하였다. 아아! 은표는 실로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다. 여러 해 의병을 경영하는 동안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금년 봄이 되어서야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마련하여 밖으로 나가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뜻하지 않은 변고가 생겨 몸만 살해당하고 일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하늘은 어찌 우리나라를 돕지 않는가? 모집한 병사들은 점점 모두 흩어질 것을 이로부터 알 수 있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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