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빌라 이야기 마흔 번째]진작 말 좀 하지 그래!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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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이야기 마흔 번째]진작 말 좀 하지 그래! (1편)
  • 한들신문
  • 승인 2021.02.0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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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이게 누고? 막내 아이가! 니가 여기는 왜 왔노? 뭐 할라고 왔노! 아이고 막내야.”

오십 넘은 아저씨도 누나 앞에서는 그저 막내다. 누나는 곧 아흔이다. 입원 소식은 늘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누나는 침대에 누운 채 손을 뻗어 아저씨를 반겼다. 손을 잡고 쓰다듬으면서도 말은 타박에 가깝다. 미안해서 그러는지 반가워서 그러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남의 집 종살이하듯 산다는 동생을 찾아갔을 때, 누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시키는 일은 다 했을 거고, 잠자리며 먹는 거야 뻔해 보였다. 동생 앞으로 나오는 돈을 누가 챙겼다느니 하는 말이 오갔다. 그 세월과 그 지경에도 웃기만 하는 동생이 불쌍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했다. 누나는 이제라도 동생이 편하게 살기 바랐다.

며칠 병석에 누웠던 누나는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아저씨와 장례식에 갔다. 30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다는 조카, 돌아가신 누나의 막내아들이 아저씨를 반갑게 맞았다.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아저씨 손을 잡고 멋쩍어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자주 만나고 소식하겠다고 했다. 떠나는 누나 대신 조카가 나타났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천륜이라는 게 이런 건지, 이렇게 연을 이어가고 생을 꾸리는구나, 그 연을 어지럽힐까 두렵다.

진작 말 좀 하지 그래. 너 누이가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누나를 보내고 일 년쯤 지나 아저씨와 고모를 찾아갔다. 고모도 곧 아흔이다. 자식 같은 조카, 말이라고는 없던 조카가 인사하고 안부를 묻자 고모가 놀랐다. 일 년만 일찍 말문을 열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고모도 이내 느꼈다. 병석에서 손잡던 누나에게, 마지막인 줄 몰랐던 그 날, 그럴듯하게 딱 한 마디라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아저씨의 말이 늘수록 커졌다.

아저씨가 말문을 연 건 지난여름이다. 대학생 두 명이 아저씨의 자취를 도왔다. 6년 일한 농장 주인집 아래채에 전세를 얻어 나가 산다. 이삿짐 꾸리고, 이사하고, 집들이 준비해서 손님 맞고, 아침저녁 밥하는 걸 대학생들이 살피고 도왔다. 한 명은 청주 사람, 한 명은 고흥 사람. 도시 아가씨와 시골 아가씨, 도시 아가씨는 애교가 넘치고 말씨가 싹싹하고, 시골 아가씨는 차분하고 예의가 몸에 배었다.

낮에는 복숭아밭 고추밭에 일하는 아저씨를 도와 고추 따고 복숭아를 땄다. 도시 아가씨는 모든 게 낯설다. 풋고추를 내밀며 아저씨, 이거 따면 돼요?” 묻기 일쑤. 아무리 알려줘도 그걸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그거 따면 안 돼!”

아저씨는 오십 평생 닫았던 말문을 열었다. 도시 아가씨가 내미는 풋고추에 참다 참다 말문을 열었다. 오십 평생에 자기보다 연약한 존재, 자기라도 살펴야 할 존재, 자기가 가르쳐야 할 존재를 만났다. 그래서 말문을 열기로 작정했다.

평생 남의 집 종살이하듯 살았던 아저씨, 그의 삶에서 그가 나설 일도 참견할 일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하면 하루하루가 지났다. 아저씨에게 삶은 그런 것이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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