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띄우다】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떠나 늘 ‘청산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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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띄우다】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떠나 늘 ‘청산행’을 꿈꾸며
  • 한들신문
  • 승인 2021.02.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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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지 집배원, 신승희 시인

청산행

이기철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인가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남방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야성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

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

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

가늘게 흩어지는 저녁연기가

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오르고

생목 울타리엔 들거미줄

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

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청산행, 민음사


두 해전 일주일을 제주에서 혼자 보낸 적이 있다. 구석구석 바람이 디디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는 제주는 시인의 말처럼 며칠째 청산에 발을 풀면 멀리 보이는 마라도가 밤마다 내 마음속 청산이 되어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곤 했다.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멀리 떠나 와 있으면 모자이크 속 그림을 찾아내 듯 올곧이 드러났다.

 

틈새 노란 민들레가 낮은 자리 한쪽을 채우며 봄을 데려 오고 있다. 여든이 넘은 울 엄마 한복 속에도 그 옛날 봄이 와 관광버스에 몸을 싣게 했던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떠나 늘 청산행을 꿈꾸며 살아간다. 마음도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떠나자, 그대의 청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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