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⑨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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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⑨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03.2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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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서 활동한 덕유산 의병들

1905년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났다. 거창 등의 경남 서부 지역에서는 덕유산과 지리산 등 산악 지대를 배경으로 유격전 형태의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전국의 많은 의병들이 덕유산으로 이동해 와 덕유산 의병 부대를 조직,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의 활동은 1907~1908년에 절정에 달하였다.

덕유산 의병의 주된 공격 대상은 일본군, 일본군 헌병, 일제 경찰, 일본인이었다. 덕유산 의병이 일제와 맞서 벌인 대표적인 전투로는 190794일의 월성 전투, 12월 안성 전투, 19083월 고제 매학 전투, 4월 가북 몽석 전투 등이 있다. 190812월경에는 문태수, 염도중 등의 의병장이 지휘하는 의병 약 1,000여 명이 속리산 일대와 덕유산의 거창·안의·무주·진안·장수에 포진하며 일본군과 맞섰다.

이밖에 노병대 부대는 군대 해산과 더불어 청주 진위대 해산병을 주축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속리산에서 평민 의병으로 활약해 오던 김운로 부대와 합류하여 2백 명의 부대로 강화한 뒤에는 보은. 청주를 공략하여 7명의 포로를 잡는 한편 덕유산으로 거점을 옮겨 경남 거창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1908713일 일본군에 잡힌 뒤에도 잔여세력의 유격 활동은 계속되었다.

유종환은 19079월 진주에 거주하던 중 경남 안의군 북상면(현재는 거창군)으로 올라가 김동신을 만나 의병투쟁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김동신 부대의 선봉장으로 월성 전투를 치렀으며, 그해 10월에 전북 무주. 경북 지례에서 의병 70여 명을 규합한 후 이듬해 봄 충남 영동. 황간. 전북 무주. 무풍. 경북 지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 함양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패하였다.

1908년 진주로 내려와 스스로 독립부대를 결성한 뒤 북상하여 대덕산 일대 혹은 전북 무주·장수, 경남 안의, 충남 용담·금산, 충북 영동 그리고 거창 등지에서 일제에 항전하였다. 그해 7월경 김동신 부대의 성문길, 차은표, 오대근 등이 경북 성주에서 경남 거창에 이르는 지역에서 투쟁하자 그들과 연락하며 유격 활동을 폈다.

19092월 다시 충북 황간에서 무기를 획득하여 전북 무주. 장수, 경남 안의, 경북 지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423일 의병 23명을 인솔하고 경남 거창 가북 어인을 점령하였고, 425, 오전 5시부터 경북 김천시 지례면 예영동 산골짜기에서 거창경찰서 의병 토벌대와 교전하다 의병 4명이 전사하고 유 의병장도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왼쪽 가슴에 총알이 관통하여 위독한 상태였지만 일본 군경의 조사에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유종환 부대에서 활동한 의병으로는 황대연, 이종복, 장광옥, 박문도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유종환 부대와 일본군의 교전지(경남 거창군 가북면 어인)
유종환 부대와 일본군의 교전지(경남 거창군 가북면 어인)

차은표는 1905년 안동의 석주 이상룡, 서울의 심연 김현준, 영춘의 백우 김상태 등과 의병활동을 모의하였다. 그해 11월 김심연과 김천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하였고, 19079월 전북 순창에서 기의한 김동신 의병장의 비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4월 거창군 가북면 몽석동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190868일 김동신이 피체된 이후부터는 비장 출신 성문길과 함께 5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경남 거창·경북 성주 지방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8년 안동의 이상룡은 예천의 이규홍에게 군자금을 요청하자 이규홍은 아들 지선과 사위 이세형을 통해 거창의 차은표에게 군자금을 전달하여 거창의 가조산(가조면에 있는 산으로 추정됨)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차은표 등은 1909년 의병 수백 명을 규합하여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차은표를 대장으로 김상태를 중군장으로 삼아 풍기·순흥·영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95월 차은표가 순국하면서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차은표 부대와 일본군의 교전지(경남 거창군 가북면 몽석)
차은표 부대와 일본군의 교전지(경남 거창군 가북면 몽석)

김백원은 문태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908년 음력 1010일부터 다음 해 910일까지 동료 의병 30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북 무주·장수, 충남 금산, 충북 영동·옥천, 경남 안의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음력 1220일 경남 안의군 신평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고, 1230일에도 안의군 황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1909424일 문태수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40여 명과 함께 전북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였고, 같은 해 58일 전북 남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김진화는 19066월부터 김동신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9078월 남원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2명을 사살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11일 구례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여 병기를 노획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같은 해 910일에도 그는 김동신의 지휘 아래 전북 순창 우편취급소와 순사 주재소를 습격 점령하는데 참여하여 관물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81월까지 그는 김동신 및 정일국의 지휘 아래 전남 구례, 담양, 경남 안의, 거창, 하동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박진창 의병장이 전사 순국한 장소 (경남 거창군 고제면 둔기)
박진창 의병장이 전사 순국한 장소 (경남 거창군 고제면 둔기)

박진창은 1908년 유종환 의병부대에 소속된 의병장으로 4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경남 거창. 안의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214오는 16일 전라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지인 대덕산에 집합하므로 각 면의 주민 1호에 대해 초화 5, 화승 15정씩을 휴대하고 내회 하라는 격문을 안의군 각 면에 배포하였다. 동년 34일 경남 거창군 고제면 둔기촌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이태룡, 『무주 덕유산 의병』, (2013년) 
2.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3. 국가보훈처,「별집 제1집」,『독립운동사자료집』787p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사편찬위원회 (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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