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빌라 이야기 마흔네 번째]잊히는 존재가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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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이야기 마흔네 번째]잊히는 존재가 될까 두렵습니다
  • 한들신문
  • 승인 2021.04.0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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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나면 이전 풍경이 가물가물합니다. 사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하고 궁색합니다. 오래 만나지 못하면, 추억 속에 머물다 사라지고 없는 옛 건물처럼 잊히죠. 요즘 좀 바빠서, 요새 몸이 좋지 않아서, 가까우면 한번 가볼 건데, 늙은이가 가면 짐만 되지, 아직 어려서부모형제, 친구,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을 누가 자꾸 훔칩니다.

시설 입주자의 형편도 비슷합니다. 시설에 사는 처지가 얼마 안 되는 시간마저 빼앗습니다. 시설에 살아도 여느 사람들이 소식하고 왕래하는 정도로 오가면 좋겠는데. 갈 형편 아니면 오게 하고 올 형편 아니면 찾아가고, 아프니까 오게 하고 아프니까 가서 보고, 언제 볼까 해서 만나고 언제까지 기다려 줄까 해서 만나면 좋겠습니다.

바쁜 거 지나면, 날이 좀 좋아지면, 아픈 거 좀 나으면 만나겠다는데 그때가 언제일지, 기약 없이 기다리지 말고 지금 만나기 바랍니다. 바쁜 사정, 아픈 사정, 거리 사정, 나이 사정사정 봐주지 말고 지금 연락하고, 지금 만나고, 지금! 함께하게 주선하기 바랍니다.

 

1. 어머니가 수술 앞두고 전화했다. “내가 수술하게 됐어요. 다리가 하도 아파서 수술하는데, 인철이한테 말 좀 해 주세요. 설에 집에 온다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수술해요.” 아픈 다리보다 집에 올 아들 걱정이 크다. “수술은 잘 됐다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수요일에 다른 다리도 한다고 하네요. 내가 이렇게 아프니아이고 안 되겠어요. 인철이가 설에 오기는 어렵겠어요.” 작년처럼 아버지 생신에 갈 수 있을지 물었다. “저 아버지도 병원에 있으니.”

2017115일 일지, 최희자

 

인철 씨 아버지는 작년에 요양병원 입원해서 여태 계십니다. 어머니는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해 남의 손 빌려 집안일을 합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입원했고요. 두 분, 언제까지 병원 신세를 질지, 끝은 있을지 막막합니다.

인철 씨는 작년 아버지 생신 즈음 부모님 댁에 다녀왔습니다. 집에서 어머니 뵙고 병원 가서 아버지 문안했죠. 이번에 어머니 수술 소식 듣고 당장 찾아뵈면 좋겠는데, 어머니는 어쩐 일로 아들이 오는 걸 말립니다. 설에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평상시에 뜸해도 아프면 오가는 게 가족인데, 어쩐 일로 오지 말라는 건지, 어머니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명절 지나 한산할 때, 어머니 찾아뵙고 인사드릴 겁니다. 아버지 병문안도 하고요. 병원 신세도 남은 생도 기약 없으니 오히려 더 자주 찾아봬야죠. 어머니는 기어이 말리겠지만, 어머니 한숨 돌리면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2. 어진이 동생 재균이한테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재균이에요. 내일 누나한테 놀러 갈 건데, 저 데리러 집에 올 수 있어요?’ 재균이를 데리러 어진이 부모님 댁에 갔다. 재균이와 다른 아이 한 명이 더 있었다.

넌 누구니? 재균이랑 많이 닮았네.”

사촌 동생이에요. 재희 누나 동생 태균이요.”

, 이종사촌이구나. 그런데 너희 둘 정말 많이 닮았다.”

, 남들도 그래요.”

재균이와 태균이가 누나 보러 누나네, 월평빌라에 왔다. 고등학생 재희는 공부하느라 못 왔다. 어진이가 두 동생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휠체어에 앉아 몸을 흔들고 소리치는데, 곧 넘어갈 기세다.

친동생 재균이는 물론 이종사촌 태균이도 어진이와 함께 자라서 누나가 무얼 좋아하는지 잘 안다. 누나에게 최신형 묵찌빠를 가르쳐 주고, 누나가 예전에 즐겨 봤던 만화 영화 줄거리를 알려줬다. 어진이는 기억나는지 간간이 까무러치도록 좋아한다.

2014816일 일지, 임경주

 

어진이가 열다섯 살에 월평빌라에 입주했고, 동생 재균이는 열 살이었습니다. 그때 중학생이던 오빠가 군대에 갔으니 동생 재균이도 금방일 겁니다. 지금처럼 오갈 날이 얼마나 될까요? 곧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하고 직장 다니겠죠. 지금처럼 가까이서 왕래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동생은 몸도 마음도 자라는데, 누나는 스무 살에 여전히 디지몬을 찾습니다. 지금처럼 허물없이 대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납니다. 하루라도 더 만나고 한시라도 더 붙어있게 하고 싶습니다. 묵찌빠 가르쳐 주고, 만화 영화 이야기할 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한때라도 더 만나게 하고 싶습니다.

 

시설에 부모형제 둔 가족의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집마다 그만한 형편과 사정이 있고요. 그래도 주말 방학 졸업 생일 기일 출산 입원 장례 명절일마다 때마다 소식하고 왕래하기 바랍니다. 시설에 살아도 말입니다.

잊히는 존재가 되는 게 두렵습니다. 부모형제, 친구, 이웃의 손길 거두고 그들의 몫을 빼앗는 도둑이 될까 두렵습니다. 부모형제, 친구, 이웃에게 잊히는 존재가 되도록 방조하는 꼴이 될까 두렵습니다.

지금, 미루지 말고, 지금 소식하고 지금 만나게 주선하며 거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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