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⑩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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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⑩ 1910년 이전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04.1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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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서와 삼가의병단의 활동

1907~1908년 합천군 삼가지역을 중심으로 가회·대병·묘산·산청·거창·안의·함양 등지에서 활동한 삼가의병단'이 있었다.

현재의 거창군 신원면은 당시 삼가군에 속한 지역이다. 합천의 삼가지역은 경북을 비롯한 전북의 의병들이 이동해 오거나 경남의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는 의병들이 일시적으로 이용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위치한 가야산에 사찰이 많아 의병 활동을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190711~19092월에 조직된 삼가 의병단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수월동 출신인 김화서가 대장으로 190711월부터 부하 30명을 거느리고 주로 합천 삼가지역을 중심으로 거창·안의·함양 등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삼가의병단의 구성원으로는 거창군 가조면 안금마을 심낙준, 합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전성구·김유준, 거창 가북면의 김재한·김상래·오낙삼, 거창 남상면의 변원석과 변원화, 삼가군 덕지면 갈전(가회면 함방리)의 최남수, 거창 남상면의 전재관·김문점·송영수 등이 있다.

경남 거창, 합천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던 김화서, 심낙준의 사형 집행을 기록해 놓은 '조선총독부관보'(1943년 11월 10일자)
경남 거창, 합천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았던 김화서, 심낙준의 사형 집행을 기록해 놓은 '조선총독부관보'(1943년 11월 10일자)

이밖에도 김우옥·이차봉·이소봉·김화숙·김찬숙·김응오·한치문·장명언 등은 합천군 삼가면 출신(추정)으로 1908년 경남 합천·산청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다. 이들은 1908년 전반기에 삼가·합천·단성·산청 일대를 전전하면서 군자금 모집활동과 일제의 통감부 관공서 습격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1908424일 삼가군 대평면에서 신화 23원을, 같은 달 28일 합천군의 모처에서 다시 신화 17, 엽전 8관문 등을, 51일 합천군 모 영수원 집에서 엽전 1300문을, 그리고 같은 달 6일 삼가군 문송면 모처에서 엽전 2관문 등을 모집하였다.

또 한때 이들은 산청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를 방화하고 관급품 일체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08512일 삼가군 감한면에서 삼가 주재소 경찰들에게 동료 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제 군경은 잔여 의병들을 체포하고자 518일 삼가군 고현면으로 이들을 데리고 출동하였다. 이때 이들을 구하려는 박수길 등의 의병들이 일제 군경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전원 피살 순국하였다.

위와 같이 1908년 당시 의병 구출 작전을 전개하는 등 의병전쟁이 조직화됐음을 알 수 있다. 518일 이날 삼가 의병단의 박수길과 김팔용, 삼가군 출생인 이두익, 삼가군 목동(가회면 목곡마을)의 성만석, 봉산면 송림리의 신상호 등 10여 명이 한치문·이소봉 등 8명을 구출하려고 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이때의 작전에 참가한 박수길·김팔용은 19086월 경남 삼가군 일대에서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삼가군 중촌면 덕지면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0881일 진주의 성내 2동에서 김팔용 등과 함께 숙박하던 중 일본 순사 3명과 한국인 순사 4명에 의해 체포되었다.

삼가 기양루 (경남 합천군 삼가면) *구한말까지 삼가군 관아의 누각으로 쓰였다.
삼가 기양루 (경남 합천군 삼가면) *구한말까지 삼가군 관아의 누각으로 쓰였다.

신상호는 1908627일 경남 산청군 점촌 부근에서 일본군 함양수비대와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상호 의병부대는 7명이 전사하고 의병연명부 등을 빼앗겼다. 19088월 하순에는 가야산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추적하던 성주수비대에 경남 거창군 송정 부근에서 화승총 9정을 빼앗기고, 성주의 한 주막에서 의병 7명이 체포되었다. 831일 삼가군 평구에서 주둔하던 중 신상호 이하 4명이 삼가분견대에 체포되었다. 신상호는 체포된 뒤 일본군에 피살, 순국하였다.

성만석은 190883일 경남 산청과 인접한 황매산 지역을 수색하던 일본군 유전파견대와 전투 중 부상을 당하여 체포되었다. 이날 성만석 등 6명의 의병은 합천군 삼가면 목동 부근에서 일본군 유전파견대와 마주쳤다. 이 전투에서 5명의 의병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성만석은 어깨에 총상을 입고 체포된 뒤 부상이 심해 같은 날 저녁 순국하였다.

이두익은 1907년부터 경남 합천, 삼가, 거창 등지에서 의병 100여 명을 지휘하며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벌였다. 그는 특히 손태주(마산), 이준명(성주), 영기선(영산) 등 의병 수십 명과 함께 190848일 합천 우체국을 공격했다. 그러던 중 520일 삼가군 모고면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김화서의 삼가의병단1909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는데 1909325일 합천군 사상면 화양동의 부호 윤석우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김문점·김상래·김재한·변원석 등은 같은 해 518일 삼가군 고현면 장기동 장날과 618일 합천군 해인사 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삼가군 정찰을 하던 김유준이 체포되자 김화서는 김유준·송영수·심낙준·오낙삼 등과 시장 각처에 방화를 한 뒤 그 혼란을 틈타 김유준을 구출하였다. 그 외에도 경남 일대에서 190910월부터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0974일 부대장 심낙준 외 7명이 체포되었는데, 취조 결과 김화서가 그 대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어 1910127일 체포되었다. 이들의 활동이 지속적인 의병항쟁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음은 같은 의병부대에서 활약하다 체포되어 사형을 받았다가 가까스로 피신한 뒤, 26년 만에 소위 전매령 위반으로 체포된 전성구의 증언기록(동아일보, 1934.10.21)에서 확인된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공훈록』21권 (2014)

2.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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