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빌라 이야기 마흔다섯 번째]실수·실패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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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이야기 마흔다섯 번째]실수·실패할 권리
  • 한들신문
  • 승인 2021.04.1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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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빌라

시설 입주자는 실수·실패할 권리가 있습니다.

집마다 싱크대와 전기렌지를 들이고 요리할 여건이 되자 강자영(가명) 아주머니가 밥을 했습니다. 밥을 곧잘 했고 그것은 쉬웠습니다. 라면은 달랐습니다. 밥 짓는 물은 잘 맞추는데 라면 끓이는 물은 늘 넘쳤습니다. 직원이 여러 번 설명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물이 많아도 아주머니는 맛있다고 했습니다. 싱겁게 드신다고 여겼습니다. 잔소리하는 것 같아 멈췄습니다. 가끔 아주머니가 라면을 끓여도 냄비의 물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실랑이하지 않으니 마음이 여유로웠고 아주머니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끓인 라면을 우연히 봤습니다. 이게 웬일! 물이 적절했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주머니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끓였다고 했습니다. 직원이 옆에서 알려줄 때는 머뭇했지만,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며 요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실패할 권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당신의 기대가 아이의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만약 당신의 아이가 언젠가는 컵으로 물을 마시는 기술을 습득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당신은 아이가 성공하기 전에 가능하면 보다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 반면에 당신이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가 보내는 첫 번째 어려움의 신호에 도움을 준다거나 그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그가 그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일레인 게라리스 지음,뇌성마비 아동의 이해(시그마프레스)]

기대한다면 더 많은 기회를 주라고 합니다. 어떤 기회요? 컵의 물을 쏟고 컵을 놓치고 심지어 컵을 깨뜨려 물을 엎지를 기회, 자기 삶을 살 기회, 실패·실수할 권리를 주라고 합니다.

어느 시설 직원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설에 사는 아저씨를 모시고 마트에 갔습니다. 입구에서 설명하고 필요한 것을 사도록 안내했습니다. 마흔 넘은 아저씨가 한참 둘러보더니 걸음을 옮겼습니다. 문구 코너에 멈추더니 여자아이가 할 법한 작은 머리핀을 집었습니다. 순간 시설 직원은 아저씨를 말리려고 했습니다. ‘안 돼요! 머리핀은 아저씨에게 필요 없어요. 아저씨가 살 물건이 아니에요.’하는 말이 치닫는 것을 참고, ‘머리핀을 어디에 쓰는가 보자.’며 그냥 두었습니다.

아저씨가 천 원짜리 머리핀을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저씨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직원이 놀라서 뒤쫓았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선 아저씨는 어느 여직원 앞에 서더니 머리핀을 꺼내서 건넸습니다. 아저씨에게 필요 없고 아저씨가 살 물건이 아니라며 말렸더라면.

시설에 사는 성인 남성이 고작 천 원짜리머리핀을 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헬스클럽을 한두 달 다니다 포기할 수 있을까? 미용실을 바꾼 지 얼마나 되었나? 여행 중에 계획을 바꿀 수 있을까? 직장을 구하며 거절당하거나 이직과 사직한 적이 있는가? 짜장면을 먹겠다는 계획서와 달리 짬뽕을 먹을 수 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성공해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라는 성공 신화, 행복 신화가 실수·실패할 권리를 제한합니다. 갈림길에 서는 걸 막고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기회를 빼앗습니다. 성공 신화, 행복 신화의 희생양이기는 기관과 직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화의 유혹은 치밀하고 대단합니다. 보고서에 실패와 실수를 적는 건 용기가 필요하고, 그나마 성공이라는 반전이 있어야 가능해 보입니다.

시설에 사는 아주머니가 라면 끓이는 물을 맞추지 못할 권리, 시설에 사는 아저씨가 천 원짜리 머리핀을 살 권리, 그럴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실수·실패할 권리가 삶을 살게 하고 여유를 주며 갈 길을 밝힙니다.

실수는 없다는 실수가 큰 실수입니다.

실패는 없다는 실패가 큰 실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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