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띄우다】예고 없이 다가오는 생. 그렇게 또 봄날은 오고 갈 것이다
상태바
【시를 띄우다】예고 없이 다가오는 생. 그렇게 또 봄날은 오고 갈 것이다
  • 한들신문
  • 승인 2021.04.19 16: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 편지 집배원, 염민기 시인

아마릴리스

신중신

 

떠나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떠나가 버릴 것만

예고 없이 다가와

문득 이마를 서늘하게 한다

뜰을 화안히 밝히는

아침의 아마릴리스

그저께는

그저께의 진눈깨비가 흩날리더니

오늘 아침엔 바람이 불어

풀잎의 이슬을 털고 갔다

진눈깨비든 이슬이든

그것은 이미 각자의 과거로서 간직되고

자유도 희망도 꿈도

지나가 버린 뒤 그 모습이

우리의 눈을 찌른다

왜 우리는 이처럼

그것들의 등만 바라보게 되는 것일까

언제나 이런 공허

영영 떠나가지 않을 공허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일까

-- 이 아침 무심히 뜰을 밝히는

한 송이 아마릴리스

 

거창문학 창간호. 1988


절기의 시작을 알리던 입춘 날, 인터넷 검색어 상위에 춘래불사춘이라는 한자성어가 올랐다.

봄은 왔는데 봄이 아니다.’라는, 뜻하는 바가 크다.

요 며칠 바람이 잦고 매서웠다. 그 봄바람에 피고 지는, 또 피어나는 꽃은 얼마나 많을까.

꽃이 피는 이유든,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은 한참이던,

우리가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보낸 그건 이미 과거. 뜰을 밝힌 아마릴리스도 어제의 꽃이 아니고, 오늘 핀 꽃잎은 내일의 것도 아닌, 떠나가 버릴 것만 예고 없이 다가오는 생. 그렇게 또 봄날은 오고 갈 것이다.

꽃말이 눈부신 아름다움인 노시인의 헌화가. 이른 봄볕 속 이마를 서늘하게 하는 꽃 한 송이를 읽는 지금도, 꽃을 시샘하는 추위는 아스스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