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띄우다】때론 아름다운, 또는 애틋하거나 가슴 저릴 정도로 처절한 그런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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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띄우다】때론 아름다운, 또는 애틋하거나 가슴 저릴 정도로 처절한 그런 추억
  • 한들신문
  • 승인 2021.05.0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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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지 집배원, 김태수 시인

그런 복숭밭

김태수

 

퇴근하여 느릿느릿 걸어 닿은 하숙집

해는 중천, 오뉴월 따끈따끈한 햇살 번지면

눈부시게 푸르던 볏잎, 그땐 내 인생도 저 벼들처럼

푸르렀던가 하숙집 문고리를 당기면 늘 톡 떨어지는

종이학(), 접힌 종이학 하나 펼치면

선생님 복숭 사먹으러 가요 춘자(春子), 숙이(淑伊)

그렇다 내게도 그런 때가 분명 있었던가 보다

 

하숙집에서 한 마장 어둑어둑한 논둑 길 따라

학교 지나 산모퉁이 또 한 구비 돌아가면

복숭밭, 때론 비오는 날이면 말숙(末淑)이랑

마을도 가려진 산모퉁이에서 길게 뽀뽀도 하고

또 어쩌다 스물 서넛 나이 장가든 동무들처럼

왜 그걸 못했던가 이 쉰 나이 중반의

허름한 길모퉁에 서서 생각할수록

 

너무 슬프다 그런 복숭밭 몇 개 두고 온 것이.

 

실천문학 제77, 2005

 

사람에게는 모두 지난 추억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때론 아름다운, 또는 애틋하거나 가슴 저릴 정도로 처절한 그런 추억을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거창에서도 오지 학교에 있었지만 내가 처음 신임교사라는 이름으로 발령된 곳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오지인 C()이다. 대구에서 차로 근 예닐곱 시간이 되어야 군 소재지, 다시 한두 시간을 기다려야 학교 입구로, 그리곤 두어 마장을 더 걸어야 비로소 학교에 도착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땐 학교생활이 왜 그리 힘이 들었던지. 퇴근하여 하숙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어 늘어지는, 밤이면 호롱불 심지를 돋우고 질이 누런 종이로 만든 문학잡지를 읽다간 이내 잠이 들곤 했는데 아침에 세수를 하다 보면 콧구멍에서 나오는 새까만 이물질들! 호롱불 심지가 만든 그을음이었다.

그런 나날들만 아니었다. 어떨 때 퇴근하여 하숙집 내 방문을 열면 문지방에서 떨어지는 쪽지 하나, 또박또박 쓴 글씨는 선생님 복숭 사 먹으러 가요. - 춘자, 숙이였다.

그렇다. 한 번도 춘자, 숙이랑 복숭을 사 먹으러 가진 못했지만 그런 추억들이 학교를 정년퇴직하고 다시 산골에 이사하여 살면서 자꾸만 되살아 나오는 것은 진정 절심함일 것이다. 바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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