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4월 한국주차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가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 앞으로 보낸 <통보-적도 체포에 관한 경성 헌병 분대장으로부터 보고>에 의하면 경남 거창군 가서면 지촌에 거주하는 양반 유생 김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훈은 강원도에 있어서의 적도 수괴 이인영의 참모장으로 소문이 있는 자인 바, 지난 3월 27일 총기 탄약 구매 차 경성에 잠입한 것을 탐지하고 북서 삼청동 6통 9호 이룡서 방에서 헌병이 체포하여 취조 중이다. …」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김훈은 의병장 이인영의 참모장으로 일본군과 10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8년 총기 구매를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일본군에 체포가 된 것이다.
이 밖에도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던 의병들이 대거 체포되었는데 대다수 문태수 의병부대의 부대원들이었다. 강이봉은 1908년 (음력) 12월 20일 유종환 등 동료 의병 10여 명과 함께 경남 안의군 북상면의 이장 이 씨 집에서 총 1정과 군수품을 징발하였다.1)
강진여는 문태익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전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전북 장수를 습격하고, 무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안의군 황산에서 군자금 3,100냥을 징수하던 중, 부호 신종삼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거창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 본부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2)
장광옥은 1908년 유종환 의병부대에 입진하여 유종환 외 7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1909년 3월 초순 경남 안의군 당삼촌 박 모로부터 엽전 100냥을 모집하였다. 또한, 3월 하순에는 전북 무주군 횡천면 마전리 양성순의 집에서 지폐 10원, 탁주 1독, 돼지 1두를 모집했고, 상두리 김 모로부터도 백목 1필, 엽전 10냥을 모집했다. 또한, 무주군 풍서면 이남리 이 모로부터 군자금으로 25냥을 모집하고 피체되었다.3)
한진수는 1907년 11월 위천면 황산의 김 모 자택에 돌입하여 3백 냥을 징수하였고, 12월에는 북상면 사양동 정 모 가택에서 120원을 징수하였다.4) 김재문과 심낙광은 1908년 2월 의병 수명과 함께 위천면 황산 김 모 가택에 돌입하여 군자금 150냥을 징수하였다.5) 박학수는 1908년 2월 위천면 황산 신 모 가택에서 1백 냥을 징수하였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일본군의 남한토벌작전으로 의병은 세력이 약해졌다. 거창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중대는 1909년 2월 2일 호남 의병 진압을 위해 전남 순천으로 이동하였고, 경남 산청 덕산에 주둔하였던 보병 제14연대 제3중대 1소대가 2월 8일 거창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6)
이 시기 의병의 전력은 약화되었지만 의병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09년 2월 25일 의병 12명이 북상면 갈계동에 거주하는 임당동의 집에 침입하여 엽전 250냥을 징수하여 도주하였고, 2월 27일 의병 7명이 동리면 상율동에 거주하는 김자범의 집에 침입하여 마포 10필. 시 10개를 징수하여 도주하였다. 2월 28일에는 고현면 상천동 공전영수원 경헌중의 집에 침입하여 엽전 274냥과 신화 22원을 징수하여 도주하였다.7)
1909년 3월 11일 북상면 월성동. 산수동. 분계동. 당산동 방면에 문태수, 전성범, 박춘실, 유종환 4명이 연합하여 약 100명의 의병부대를 집합한다는 정보를 접한 거창경찰서 수비대와 거창, 안의 헌병대는 연합하여 의병 토벌에 나섰다. 이때 거창경찰서는 일본인 순사 3명, 한국인 순사 6명으로 한국인 순사는 변장시켜 정찰로 보냈으며, 거창수비대는 신기동을 기점으로 척후병을 파견하였다.8)
3월 13일 의병 34명이 거창읍에 내려와서 장팔리 김수복의 집을 습격하여 엽전 124냥을 징수하였다. 4월 7일에는 의병 6명이 주상면의 유백운 집을 습격하여 마직물 등 금품을 징발하였으며, 4월 7일에는 가북면 홍이동에서 의병 5명이 홍치안 부자를 납치하였고, 4월 12일 가북 우혜를 습격한 의병 5명은 자위대원과 싸웠으며, 이어서 남흥면 불계리의 조국서 집에 침입하여 금품을 징발하였다. 8월 5일에는 의병 5명이 남흥면 이소사의 집에서 금품을 징발하였고, 18일 의병 8명이 한국인 순사를 공격하였다.
1909년 6월에는 의병 ‘토벌’을 위해 일본군 수비대가 위천면에 주둔하였고9) 그곳의 유지 정태균의 도움으로 위천면 강동에 임시 막사를 설치하고,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약 1년 동안 일본군 수비대는 식량과 뗄감 등 기타 각종 편의를 제공받아10) 의병 ‘토벌’을 위한 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태균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친일파로 변모하였다.
1910년에도 덕유산 의병의 활동은 지속되었지만 세력은 한층 약화되었다. 1910년 5월 25일 무풍 전투에서 의병 76명이 전사함으로써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11)
1910년 6월 10일 일본군 수비대는 감악산 연수사에 있던 의병 20명을 공격하여 이 중 5명이 전사하였고, 7월 24일에는 12명이 연수사에서 전사하였다. 감악산 연수사에서의 전투는 거창 의병의 마지막 항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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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국가보훈처,「별집」제1집,『독립운동사자료집』, 818·819p
2)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제10집 275p
3)국가보훈처,「별집」제1집,『독립운동사자료집』1권, 906·907p
4)판결문 : 명치 43년(1910) 공(公) 제25호
5)판결문 : 융희 3년(1909) 형(形) 제185호
6)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집,
의병편 Ⅵ 융희 3년(1909) > 2월, 전국 > 통보
7)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3권,
의병편 Ⅵ융희 3년(1909) > 3월, 경상도> 폭도 래습에 관한 건
8)국가보훈처,『독립운동사』제13권,
의병편 Ⅵ 융희 3년(1909) > 3월, 경상도 > 폭도 토벌에 관한 건
9)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제15집,
의병편 Ⅷ ( 9 ) 융희 3년(1909) > ( 1 ) 7월, 전국 > 통보
10)「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 (조선총독부), 1935년
11)신용균,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역사공간, p255 4~5줄
12)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 제19권,
의병편 XII 적정 통보 > (二) 6월 > 통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