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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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惡이다
  • 한들신문
  • 승인 2021.05.17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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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거창지회 초대 지회장 윤진구

권력은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는 데서 비극은 태어난다. 수직의 권력은 횡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100여 년 전 영국의 역사학자 액턴 경이 한 이 말은 ()부패 투명 사회를 꿈꾸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지침이 되고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의 헌정사는 절대 권력을 용인했고, 그 속에서 필연적인 절대 부패를 양산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 개헌 이후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부패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패하기 쉬운 정치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 자리를 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유력 주자들의 이름과 지지율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들만의 잔치에 구경꾼들을 모으려고 발버둥이다.

지난 10일 대통령의 취임 4주년 특별연설과 즉석 기자회견이 있었다. 예상대로 현안 중 하나인 수감 중인 전직 두 대통령과 재벌 회장의 사면 문제가 언급됐다. 사면 문제에 언제나 따라붙는 단어가 국민화합’, ‘국민통합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수천만 원이 뛰어오르는 집값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무주택 서민들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정보의 비대칭성을 악용해 개발 예정지 부동산 투기를 일삼아 떼돈 버는 공직자들이 횡행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노동자의 부음이 들려오는 현실에서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 말을 삼키고 침묵하고 싶을 때 만세를 불러야 하는 비극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나는 국민화합은 국민 사이에 동질감이 형성되어 공동운명체로서의 연대의식이 있으며 피차간에 국가 앞에서 균등한 봉사와 혜택을 받고 있다는 평등감과 애착이 있어야 이룩된다.고 한 어느 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약간은 장황하지만 읽고 되새길 만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에나 다른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비록 채택할 값어치가 없는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이론(異論)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어야만 다수의견의 정당성을 검증할 기회를 얻게 된다. 반대 의견도 없이 일사불란, 만장일치가 이루어져 버린다면 그 결정의 정당성을 따져볼 방법이 없다.

권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삼키는 영합은 그 권위 자체를 멍들게 한다. 나는 모두 옳다. 나를 따르라 는 고함은 공허하다. 당론을 거역한 국회의원의 투표는 소신인가? 징계 대상인가? 20대 국회 말 패스트 트랙(fast track)으로 통과된 공수처법 의결과정에서 집권 여당 의원이 당론을 어기고 기권표를 던졌다는 이유로 소속 정당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물론 여당의 입장에선 현실적인 이유가 따로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자신의 소신과 철학에 따라 한 투표행위가 당의 방침에 어긋났다고 징계하겠다는 것은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행위다. 그동안 검찰 권력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공수처법 제정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검찰 권력도 통제할 여지가 있음은 분명하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악()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소속 정당의 당론만 무조건 따라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도 안 되고 출신 지역만을 돌보는 자리도 아니다. 결국 대한민국 국회의 의원이고 제대로 정부가 돌아갈 수 있도록 감시하고 입법노동자로서의 역할도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고대 도시국가의 민주 시민들이 가슴을 열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나눈 광장이었다. 그 광장이 닫히면 민주주의도 닫히고 만다. 광장의 속성은 열림이다. 열림은 여러 가지 다른 생각의 인정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그 광장이 활짝 열렸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색다른 목소리엔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의회의, 정당의 이단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가끔 잘못을 말하면 얼굴을 붉히고 덤벼드는 모습에도 익숙해졌다.

몸이 곧아야 그림자도 곧다. 몸이 비틀어졌으면서 그림자가 비틀어졌다고 탓하는 건 어리석다. 말해야 할 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할 수 있어야만 조화로운 질서는 바로 선다. 완승(完勝)의 으스댐은 횡포거나 무능으로 떨어진다. 자칫 탈선으로 이어진다.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불신을 자아낸다. 설령 잘못된 지적이라고 할지라도 왜 그런 잘못된 지적이 나왔는가를 헤아릴 때 발전은 기약된다. 권력도 역사와 그것을 가꾸어 나가는 국민의 숨결에 비하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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