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님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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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님의 축복
  • 한들신문
  • 승인 2021.06.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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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임 조합원

아침 6시, 누운 채로 베란다 난간을 바라본다. 일기예보에는 오늘 분명 비가 온다고 했었다. 반갑게도 난간엔 할머니 집 빨랫줄에 옹기종기 앉았던 제비들처럼 다정하게 빗방울이 거꾸로 선 채 매달려 있다. 
‘야호, 오늘은 한가하겠다.’
 비가 오는 날은 참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먼저, 지난 비에 옮겨 심은 목단 싹에 물을 줄 걱정이 없어진다. 작년 가을에 뿌린 씨앗이 자란 것이라 여리디여려, 물을 제때 주지 않으면 고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당한 때 내려 준 이 비로 이들은 어깨춤을 추며 노래까지 할 것이다. 죽음보다는 삶에 가까워졌다는 걸 스스로 알고들 있을 테니까…….
 옥상에 꺾꽂이해 놓은 은행잎 조팝나무와 제라늄도 걱정이 없다. 조팝나무와 비슷하지만, 잎 모양이 은행잎을 닮은 은행잎 조팝나무는 값이 꽤 비싸, 올해 새로 올라온 순으로 꺾꽂이한 지 꽤 되었다. 꺾꽂이한 탓에 매일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데 오늘 이 비로 물을 줄 필요가 없어진다. 오전에 옮길 계획이었던 호박과 목단 싹을 옮길 때도 그렇다. 포기당 일일이 물을 주어가며 옮겨야 하는데, 이 비로 물을 주는 수고가 덜어진다.
 비 오는 날 일을 한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에겐 이해되지 않을 수 있지만, 뙤약볕과 더위에 수없이 시달려 본 사람은, 천둥과 번개를 치지 않는 한, 비 오는 날이 오히려 일하기 좋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맑은 날 삽질과 호미질을 번갈아 하다 보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목은 마르고, 옷은 소금기로 찝찝하니 젖고, 종래엔 중도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많은 일을 나 대신해 주는 감사한 비가 오는 오늘 같은 날, 집에 머문다는 것은 은혜를 배반하는 일이다.
 간단한 새참으로 어제 먹다 남은 빵조각과 참외, 물을 챙겨 들고 주상 완대에 있는 밭을 향한다. 5월을 넘어선 가로수 길은 성숙한 여인처럼 무르익어 푸근한 푸른빛이다. 밭을 오르면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소나무도 반갑다. 이미 전지된 가지마다 정겨운 빗방울을 달고, 뿌리로는 순종하듯 비를 받아들이며 순수한 모습으로 자라나는 소나무, 편안한 모습이다. 
 하지만 일일이 눈길을 줄 새가 없다. 오늘 먼저 할 일은 옮기다 남은 목단 싹을 어디에다 옮길 것이냐다. 지난 비에 80여 포기를 옮겼으니 이번 비에도 그 정도는 옮겨야 한다. 지난번 옮긴 싹들의 상태를 둘러본다. 대체로 잘 자라고 있지만, 햇빛을 너무 강하게 받은 부분은 땅과 맞닿은 부분이나 잎이 누렇게 바랬다. 불에 덴 살갗 색깔이다. 그렇담 좀 더 그늘진 장소를 골라야 한다. 마침 작년에 자소엽을 심었으나 볕이 부족하여 수확이 변변찮았던 울타리 아래 땅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저곳이다.’
 삽과 호미를 챙겨 그곳으로 향한다. 물 빠짐이 좋아야만 하는 목단의 특성상 삽으로 둑을 먼저 짓고 호미로 구멍을 판 다음 하나나 둘씩 심어나가야 한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빗속에서도 몸의 열기는 만만치 않은 듯, 땀만 나지 않을 뿐 숨이 절로 헉헉거린다. 
 비로소 목단의 이식이 끝이 난다. 그래도 남은 싹이 서른 포기 정도, 이것들은 선생님 댁이나 평소 친구처럼 지내는 지인들에게 나눠 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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