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⑭ 1920년대 거창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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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⑭ 1920년대 거창의 독립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08.0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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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통해 독립과 사회변혁을 꿈꾸며

거창에서도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하다

1919년 3.1 운동 직후 1920년부터 거창지역에서는 청년회 등이 조직되면서 신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등장했다. 거창청년회는 각종 강연회 개최, 노동야학 설립, 주민 조직화, 교육 계몽 활동 등을 통해 거창지역의 신문화 건설을 선도했다. 1920년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민족주의운동과 거창지역을 연계시키는 고리 역할을 담당했던 조직은 바로 청년회 조직이었다.  

조선학생대회 하기순회강연단의 활동사항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1921)
조선학생대회 하기순회강연단의 활동사항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1921)

 

  1919년 3.1 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교육 계몽 운동 조직과 거창지역의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교육과 계몽 운동이 전개된 최초의 기록은 1921년 7월 조선학생대회 하기순회강연단의 강연이었다. 
  1921년 7월 24일 조선학생대회 하기순회강연단 교남 제3단 일행은 거창에 도착하여 아림청년회 회장 장상환 외 지방 인사 대표의 환영을 받고 아림청년회의 다과회에 참석했다가 경창여관에서 투숙하고 다음 날(25일) 오전에는 장상환의 안내에 의하여 거창의 고적명승을 탐방하고 오후 4시에는 선교사 토마스의 초대가 있었고, 동일 오후 저녁 아림청년회 주최로 거창공립보통학교에서 회장 장상환의 사회하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청강자는 남녀 합하여 9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먼저 순회강연단장 김정상의 인사에 이어, 경성약학교 학생 신우진의 ‘우리의 맹성할 3대의 급무’,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하태용의 ‘생활상으로 본 농업의 가치’, 이필근의 ‘무엇을 할까?’, 김정상의 ‘협력으로’란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1922년 6월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 결성한 조선교육협회에서 학교설립과 향학열 고취를 위해 전국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계몽운동에 나섰다. 

조선교육협회 순회강연단의 활동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1922)

 

  조선교육협회 순회강연단은 1922년 6월 6일 밤 거창에 도착하여 유지들의 환영을 받고 다음 날 저녁 거창공립보통학교에서 강연회를 열고 이현보의 사회에 군수 방한복의 개회사가 있고 난 뒤 연사 이춘균의 ‘자구다복’, 주 익의 ‘현대의 각성’이란 주제로 3시간의 강연이 있었다.
  1922년 시점에서 이미 거창지역에서는 지역 주민 스스로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그것을 확산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교육운동과 적극적으로 연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1923년 7월에는 교남학우회의 남녀학생이 연합하여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연극단을 조직하고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떠나 7월 7일 거창에서 공연 활동을 하였고, 1926년 8월 18일에는 거창학우회 주최의 강연회와 음악회가 거창공립보통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민족의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여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민중 계몽 운동의 일환이었다.
  1920년대 거창지역의 교육 계몽 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했었던 것은 마을 유지와 종교 단체뿐만이 아니었다. 거창에 본적이 있거나 거창지역을 벗어나 일본, 경성, 부산, 대구, 진주 등 외지에 나가서 유학하고 귀향한 유학생들의 모임인 거창유학생 학우회가 있다.
  1925년 8월 13일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거창유학생 학우회에서는 학우회 탄생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거창공립보통학교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는데 남녀 유학생 30명이 일제히 등단하여 학우회가를 비롯하여 순서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여 천여 명의 청중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1926년 1월 3일에는 유학생 학우회 주최와 동아일보 거창지국 후원으로 ‘거창 스케이트 경기대회’가 향교 연못에서 개최되었다. 
  1927년 7월 30일에는 거창유학생학우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어 학술강연의 건, 동경유학생 강연대환영의 건, 기타사항을 토의하고 폐회하였는데 피선된 임원은 회장 임문기, 총무 정길수, 서무부장 김재만, 경리부장 양판주, 문예부장 이태학, 체육부장 강성창 등이 선출되었다.
  1931년에는 거창 출신으로 경성에 유학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재경거창학우회>가 1931년 7월부터 1개월 동안 웅양면 산포동 외 3개 마을에 하기무산자강습소를 열어 약 2백여 명의 강습생을 지도하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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