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8월 14일, 14
상태바
[여성]8월 14일, 14
  • 한들신문
  • 승인 2021.08.30 17: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창여성회 회장 김귀옥

코로나-19, 4차 대유행에 방콕이 대세인 요즘 영화나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늘었다. 이미 결말을 아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은 리스트에서 제외되기도 하지만 가끔 어떤 경우엔 그 끝이 참혹함을 알면서도 서사에 이끌려 보아 버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드라마도 그중의 하나였다. 구중궁궐 깊은 곳 여성들의 침소에 칼과 횃불을 들고 왕비를 찾으려는 일본 낭인들의 야만적 폭력 앞에 스러지는 조선 여성들의 모습은 끔찍한 공포 그 자체였다. ‘나라’가 ‘나라’ 아님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건이다. 왕비의 자리에 있는 여성이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침소, 궁궐)에서 살해당하는 데도 막을 길 없는 무능한 나라를 본다! 이 사건은 이후 힘없는 나라의 여성들은 어떤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여실히 알려주는 듯하다. 공포도 이런 공포가 없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곳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을 고스란히 당한다. 역사적 맥락을 더 디테일하게 살펴봐야 하겠지만 내 생각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시작점은 여기서부터 아닐까 싶다. 역사적인 궤적은 다르지만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른 시각이 있다) 나는 이 두 사건이 동일한 맥락으로 읽혔다. 폭력과 야만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고통받았던 여성의 서사로.

  “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라고 밝히며 “정부가 일본에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라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분이 1991년 8월 14일에 공개 기자회견을 한 날을 「기림의 날」로 제정했다. 공적·법적 국가기념일이다. 지난 8월 11일 1504차 ‘수요집회’는 김학순 할머니 공개 증언 30주년을 맞아 세계 연대 집회로 진행됐다. 6개국(한국·독일·미국·오스트레일리아·일본·필리핀) 84개 단체가 “우리가 김학순이다”라는 구호 아래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와 법적 배상을 촉구했다. 물론 코로나-19, 4단계로 1인 시위 및 온라인 연대발언으로 채워졌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공개 증언에 나라 안팎의 다른 피해자들이 미투(Me Too)로 화답했다. ‘김학순 정신’은 여성인권과 존엄성 회복이 필요한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작년 ‘수요집회’에 여성회 회원들과 참여했을 때, 극우단체가 스피커를 틀고 ‘강제 동원된 거 증거 없다. 증거가 있으면 내 봐라.’며 채 5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난동을 부릴 때는 정말 섬찟했다. 증인이 살아서 증언을 하고 기록이 있는 이 역사를 부정하며 한 술 더 떠서 백래시(반발 심리 및 행동)를 하는 그 현장에서 역사에 대한 성찰이나 부끄러움은 없었다. 또 다른 형태의 전시성폭력의 재현으로, 2차 가해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최초 증언자인 김학순 할머니, 〈못다 핀 꽃〉으로 피해를 절절하게 묘사한 김순덕 할머니,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는 김복동 할머니. 이 분들이 더 귀하게 다가오는 2021년 8월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종종 잊어버리고 산다. 하지만 「기림의 날」이 있는 8월은 이 분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2021년 8월 11일 한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 생존 피해자는 14명이다. 이 중 10명이 90세 이상이다. 곧 ‘생존 피해자’ 없는 위안부 운동이 눈앞에 다가오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기억하고 미래세대와 연대해나갈지 고민하고 이 문제를 공유하고 논의할 때 아닌가 싶다. 인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연대를 통해 말을 이어갈 수 있다. 이어가는 말은 기억으로 저장되고, 그렇게 저장된 기억은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진실이며 진실의 힘은 강력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