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송대와 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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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대와 수승대
  • 박재영 기자
  • 승인 2021.10.0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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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수송대는 수승대가 됐나?

한들신문은 거창 수승대 명칭 변경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록물(도서-거창수승대 / 거창문화원 발간·오필제 씀, 문서·디지털 거창문화대전)을 참고하고, 거창박물관 구본용 학예사, 거창문화원 조재원 연구사의 확인을 거쳐 기사를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거북바위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거북바위에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최근 문화재청이 명승인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명칭을 거창 수송대(愁送臺)로 변경하는 절차를 진행하며 지역 내에서 명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거창 주민들이 수승대의 옛 이름이 수송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반대로 이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특히, 수송대가 수승대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갈등이 있었는데, 여기까지 아는 시민들은 드물다.
  수승대의 옛 이름인 수송대라는 명칭의 유래는 거창문화원에서 발간한 오필제 씨가 지은 ‘명승 수승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심으로 보낸다는 ‘수송(愁送)’
  책에서는 금릉 남공철이 ‘풍패정기’를 통해 기록한 글을 소개했다. 해당 글에는 ‘수승대는 일명 수송암이라, 삼한 시에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했다. 사신들도 연달아 이르렀는데, 빈객이 모두 여기서 전별하던 곳이라 이로 인해 이름으로 했다.’라고 적혀있다.
  또, 명미당 이건창은 수승대기를 통해 ‘이 대의 옛 이름은 수송이나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는 알지 못한다. 혹 이르기를 신라·백제 때 양국 사신이 여기서 서로 헤어지며 번번이 그 시름을 이기지 못하므로 칭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안의읍지-형승조’에는 ‘세상에 전하기를 삼국시대 사신으로 내왕하는 자 여기서 서로 근심을 견디지 못하며 헤어졌는데, 이로써 이름을 수송이라 하였다.’라고 설명되어 있고, ‘구연서원 중건기’에는 ‘본래 신라 백제의 사신이 서로 송별하던 곳이라 하여 그 이름을 수송대라고 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위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본래 명칭은 ‘근심으로 보낸다’는 뜻의 ‘수송(愁送)’으로, 신라·백제 사신이 먼 길을 떠나기 전 근심으로 헤어지던 곳이라는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찾는다는 수승(搜勝)
  수송대라는 명칭을 ‘수승’으로 고친 이는 ‘퇴계 이황’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43년,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열린 장인어른의 회갑연에 왔다가 ‘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라는 개명시를 남겼다.
  퇴계문집의 ‘기제수승대’에는 ‘안음 고현에 바위가 물가에 임해 있는데, 속명이 수송대이고 천석이 너무 아름답다. 내 가고자 했으나 겨를이 없어 가보지 못해 한이 된다. 또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해 싫어 수승으로 바꾸자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옳게 여기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의읍지’에도 이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중종 계묘에 문순공 이황 선생이 천석은 실로 아름다운데 그 명이 바르지 못해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바위 면에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 각했다.’라고 되어 있다.
  특히, 퇴계 이황이 남긴 수승(搜勝)이라는 명칭에는 또 다른 뜻이 숨어 있다. 보통의 경우 빼어날 수(秀)를 사용할 것이라 예상하는데 거창 수승대의 수는 ‘찾을 수 : 搜’를 썼다. 거창박물관 구본용 학예사는 “이는 퇴계 선생이 수승대를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으나, 반드시 다시 찾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명은 1543년, 통칭은 1800년대
  그러나 퇴계 이황 선생의 개명 이후에도 거창 사람들을 포함한 각지에서는 ‘수송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퇴계 선생의 방문 당시 안의삼동(安義三洞 :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에는 북상에 터를 잡은 갈천 임훈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40대 초반의 나이로 신진세력이었던 퇴계 선생이 이름을 바꾸려 하자 갈천 선생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디지털 거창문화대전’에 따르면, 갈천 선생은 ‘제군에게 보임’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한데, 유림하는 사람들이 소매 맞대고 분주히 오가네. 봄이 장차 저물려 할 때 그대도 장차 떠나려 하면, 봄 보내기가 시름일 뿐 아니라 그대 보내기도 시름일 텐데’라고 적었다.
  이는 갈천 선생이 수송대의 의미를 넌지시 풀이하면서 만나지 못한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그대도 지나가는 과객일 뿐’이라는 투로 퇴계 선생이 유명세를 앞세워 수송대를 개명한 데 대한 불편함과 수용할 수 없다는 의도도 들어 있다고 추정된다.
  특히,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영남 지역의 학풍을 양분한 남명 조식 선생도 개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성리학의 실천과 의(義)를 중시한 남명 조식 선생은 ‘자연 그대로’를 중요시하던 인물로, 돌에 이름을 새기거나 기존의 이름을 바꾸는 퇴계 선생과 가치관이 맞지 않았다. 이는 퇴계선생의 시를 새기기 전에는 자연 그대로였던 거북바위에 퇴계 선생의 글자가 새겨진 이후 사람의 이름이 150개, 시가 30여 편 적히게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같은 반대 여론 때문인지 거창에서는 수승대라는 이름을 바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1800년대 초 만들어진 지도에서도 ‘수송’이라는 명칭이 적혀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명 조식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직계 제자인 정인홍이 1623년에 일어난 조선의 4대 반정(쿠데타)인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축출돼 참형에 처해지면서 남명학파가 몰락의 길을 걸으며 명칭의 변화도 생기게 되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벼슬에서 멀어진 후학들이 퇴계 학맥을 얻기 위해 ‘수승대’라는 이름을 지은 인연을 강조하며 퇴계 학풍의 시를 많이 남긴 것.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승대라는 이름이 수송이라는 이름과 혼용됐고 점차 자연스럽게 수송대는 수승대로 통칭된 걸로 보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거창을 비롯한 전국에서는 ‘거창 수승대’라는 이름이 쓰이게 됐다.
  거창의 역사학자들은 ‘수송대냐? 수승대냐?’ 하는 명칭의 결정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과 수승대라는 명승을 알게 된 것이 의미 있다고 설명했다.
  구본용 학예사는 “이번 기회를 통해 명칭은 정리가 되면서도 수승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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