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⑯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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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⑯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 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10.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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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참여로 초등학교가 설립되다

거창의 13개면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증설은 조선총독부의 1920년대 “3면 1교”, 1930년대 “1면 1교” 정책과 연관되었지만 지역민들의 열정적인 교육열에 기인하는 바가 더 컸다. 일제는 1910년대부터 학교의 구역을 정하고 학교 조합 제도를 운영하였으며, 학교 평의회 제도를 만들어 학교 관련 사항을 자문하도록 하였다. 1939년 거창에도 학교 평의원회가 구성되었다.
  일제는 각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학교 설립 예치금, 학교 조합비 등의 자금을 주민으로부터 징수하였다. 따라서 지역민의 경제 능력이 없으면 학교의 신설과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가난한 면 지역에서는 학교 설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의 거창에서 일어난 학교 및 학급 증설 운동과 관련된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2년~1926년 거창군 신원면은 벽지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함으로 학생들이 통학할 처지가 못되어 면내 유지인 박채규, 신종조, 도봉균, 이병진, 김병옥, 박영근, 이상의, 곽상순, 김상묵, 홍중제 등이 학교를 설립하기로 협의를 한 후 의연금을 모집하고 대책을 강구하여 학교 건물을 건축하기로 했지만 학교 위치 선정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신원면 내 9개 마을에서 3개 마을은 교통이 편리한 이유로 구사리로, 6개 마을은 면의 중앙에 위치한 과정리를 학교 부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6년 거창군의 주선으로 2학기부터 공립보통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진학시키기로 하였으나 학교 위치 선정에 따른 주민들의 불만과 분쟁이 해결되지 않아 기부금 징수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결국 거창군 관계자가 신원면을 시찰하여 면 중앙에 위치한 과정리에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여 1926년 6월 10일 신원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42년 4월 1일 신원 제1공립보통학교로 개칭)
  1924년 거창군 웅양면 공립보통학교에서는 면장 이준옥과 면민, 유지들의 열성으로 학급을 증설하고자 1924년부터 5학급 증설의 인가를 얻어 교실을 건축하기 위하여 웅양면 3천5백 원, 고제면 5백 원, 주상면 1천 원을 분담하여 총경비액 5천 원을 거창군에 납부하였다.
  1925년 거창군 위천면의 사립위북학교에서는 원래 4학년을 졸업한 학생이 54명인데 완전한 소학교 과정이 아니라 6년제 학급 연장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있지만 교사 건축비 5천 원을 지출할 계획이 없으므로 그 말을 전해 들은 학부형들이 ‘학년 연장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 정태균, 부회장 임석종, 이사 정호균, 임성희, 전영훈 외 학무위원을 선정하여 건축비를 모금하고 학부형 측에서는 후원을 하였다.
  1926년 거창군 가북면은 산간벽지로 학생들의 교육에 불편함을 느낀 면장 전병제와 면내 유지들의 노력으로 기부금 4천 원을 적립하여 학교 설립 인가를 얻었고, 이듬해(1927) 10월 13일 가북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28년~1932년 거창군 주상면은 호수가 1천20호에 인구는 비교적 조밀하여 거창군에서 제일 빈곤한 면으로 매년 6천여 원의 면 경비도 감당할 수 없어 1면 1교 설립에 따른 임시비를 부담하기가 불가능하여 인근 월천면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자 면민 대회를 열고 8백여 명의 연서로 거창군과 경상남도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대표위원은 박래수, 류필선, 신규동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였고, 그 후 1932년 10월 28일 면장 김영선과 전 면장 신면화가 중심이 되어 ‘주상공립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1933년 4월 15일 주상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28년 거창군 마리면에서는 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위하여 유지 김영훈이 1918년과 1921년 2차에 걸쳐 면내에서 장리곡을 거두었고, 면장 김영표가 1927년에 장리곡의 우대금 3천3백여 원으로 ‘공립보통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 정두상의 성의로 기부금 3천여 원을 모집하여 5월에 건축공사에 착수한 끝에 1928년 10월 01일 마리공립보통학교를 설립 할 수 있었다.
  1928년 거창군 북상면에서는 5~6년 전부터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하고자 노력하던 중 지방유지와 면장의 발의로 면민 대회를 개최하여 ‘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임원은 회장 임성희, 부회장 임종희 씨 외 임원 10명을 선출하고 기부금 모집방법은 호세 등급에 의하여 모집하기로 하고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28년 7월 01일 북상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32년~1935년 거창군 월천면에서는 학교 설립을 놓고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월천면에는 학교가 없어 면민들이 유감으로 생각하던바 신임 면장 염병순이 중심이 되어 1931년 9월 ‘공립학교기성회’를 조직하고 면민 대회를 열어 면민들에게 호세 등급을 기준으로 850여 원 기부를 승낙받았다. 그리고 1932년 학교 건축비 5,482원의 예산을 세워 학교 건물을 건축하기로 하고, 1932년 09월 13일 가교사에서 임시로 개교를 하여 월천면의 취학예정 학생 34명의 다른 학교 진학을 중지해 놓았다. 그러나 김종한 등 몇 명이 학교 설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면장과 구장만으로 기성회를 설립하는 것은 잘못이며 거창읍과 가까운 월천에서 불경기에 학교를 설립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학교 설립에 따른 갈등이 일어나자 면민들은 1935년 면민 대회를 열어 표현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새로운 학교 기성회 임원 41명을 뽑아 기금을 모은 끝에 학교 설립을 정상화할 수 있었다.
  1932년 거창군 고제면의 공립보통학교는 1932년 4월부터 교사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임시로 궁항리의 가교사에서 학생 50여 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여 1932년 05월 01일 고제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36년 거창군 천외면(현재의 대평리, 김천리 등 일원)에서는 거창공립보통학교 교실 증축에 대하여 천외면 지역에 제2의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자는 ‘제2공보교 설립운동’이 일어났다. 천외면 지역의 제2공보교는 1944년 4월 거창남국민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개교하였고, 해방 이후 창남초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1937년 거창군 남하면의 남하공립보통학교는 학년 연장에 따른 학생을 수용하지 못하여 학부형은 물론 면민들이 유감으로 생각하여 유지 50여 명이 중심이 되어 ‘학년연장기성회’를 조직하여 1천 원의 기부금을 모금하였다. 이 기부금으로 우선 가교사를 지어 강습소를 만들고 1938년 3월에 졸업하는 졸업생을 대상으로 5학년 강습을 시작한 후 대정 14년에는 모두 6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1939년 거창군 웅양면의 웅양 제2공립 심상소학교는 한기리에 설치하기로 허가가 되었으나 학교 건물이 없어 가교사에 학생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에 면장 이현극이 자진하여 68평을 기부하였고, 이현보 650원, 김우석 100원의 기부금과 학교구역내 유지들의 기부금 500여 원의 협찬으로 학교 건물을 지을 땅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거창군 남상면에서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기금을 모아 8학급 증설을 경상남도에 신청하였다.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신용균,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역사공간 (2015)
2.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 신문자료 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 「거창학교 설치문제」 (『동아일보』, 1922. 1. 26)
2. 「웅양공보 증급 삼면민의 열성으로」 (『동아일보』, 1924. 4. 9)
3. 「육년제로 연장 위북학교 확장」 (『동아일보』, 1925. 3. 22)
4. 「보교 설치운동 거창군 가북면에서」 (『동아일보』, 1926. 11. 26)
5. 「읍외면과 합병하야 학교설립운동 」 (『동아일보』, 1928. 5. 27)
6. 「마리공보교 금월 하순 착공 」 (『동아일보』, 1928. 3. 4)
7. 「공보설립운동 면민대회 개최」 (『동아일보』, 1930. 12. 17)
8. 「기개인의 반대로 학교기성문제」 (『동아일보』, 1932. 4. 24)
9. 「준비중의 고제공보 개교」 (『동아일보』, 1932. 5. 14)
10. 「거창공보의 증축설을 두고」 (『동아일보』, 1936. 5. 28)
11. 「남하공보 학연연장 기성회 조직」 (『동아일보』, 1937. 11. 4)
12. 「웅양소교융연」 (『동아일보』, 1939.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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