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사건과 지식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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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사건과 지식인’을 읽고
  • 한들신문
  • 승인 2021.11.0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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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거창지회 초대 지회장 윤진구

이 책은 1894년에 일어나서 1906년에 막을 내린 프랑스의 근대정치사상 몹시도 떠들썩했던 한 사건에 관하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정리, 기록한 것이다.(니콜라스 할라즈 지음, 황의방(전 동아일보 기자) 번역, 한길사 刊(간))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 참모본부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으로부터 훔쳐낸 한 통의 편지를 입수한다. 익명의 발신인이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에게 보낸 그 편지 속에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프랑스 육군 장교 가운데 군의 기밀을 적에게 파는 스파이가 있음이 분명했다. 참모본부의 간부들은 이 문서의 필적이 수습 참모인 유태인 포병대위 드레퓌스의 것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한다. 그러나 드레퓌스가 혐의사실을 극구 부인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증거랄 수 있는 문서의 필적 역시 그의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가 없어 참모본부는 곤경에 빠진다. 그러자 격렬한 반유태주의 신문인 『자유언론』지가 드레퓌스의 체포 사실을 터뜨리면서 참모본부가 마치 이 매국노를 비호하기 위하여 기소를 주저하고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다른 보수적 신문들도 이에 동조하게 되자 궁지에 몰린 참모본부는 필적이 유사하다는 것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기소, 비공개 군법회의를 열어 유죄로 판결, 종신금고형을 선고한다. 이 판결에 따라 드레퓌스는 치욕적인 불명예제대 의식을 치른 후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도로 유배되어 참혹한 유형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쯤 뒤인 1896년에 이르러 참모본부 제2국장 삐가르 중령은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군의 에스떼라지 소령이 독일대사관 무관과 은밀한 연락을 하고 있으며 문제의 기밀문서는 에스떼라지의 필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삐가르는 이 사실을 상관들에게 보고하고 에스떼라지가 독일의 첩자이며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주장하나 삐가르의 주장은 그것이 군이 범한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묵살당하고 오히려 삐가르는 변방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삐가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변호사 레블르와를 통하여 상원 부의장인 케스트너에게 알리고 그에 의하여 이 진실이 발설되면서부터 일은 크게 확대된다.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에스떼라지를 고발하지만 참모본부는 스스로의 과오를 끝내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에스떼라지는 형식상 군법회의에 회부되나 오히려 군중들의 환호 속에 무죄판결을 받았고 광기 어린 여론은 무조건 군부의 편을 들어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군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국가안보를 해치는 자들로 몰아붙이는 형편이었다. 이에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진리, 정의, 인권을 지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나섰다. 
  당시 세계적인 작가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자 『로르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여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 군부의 음모 등을 만천하에 폭로하게 되자 프랑스 전국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국민 전체가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로 양분되고 재심 요구파에는 에밀 졸라, 끌레망소, 케스트너, 장 조레스, 아나톨 프랑스 등 공화주의자·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진보적 지식인들이 앞장섰고 재심 반대파에는 군국주의자·국수주의자·카톨릭교도·반유태주의자들이 한 편이 되어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재심 반대파의 필사적인 음모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드레퓌스 사건은 그 허위의 껍질이 한 겹 한 겹 벗겨져 갔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세계와 프랑스 국민들의 압력에 의하여 마침내 드레퓌스는 1899년 렌느에서 재심을 받게 된다. 이때에는 이미 사건의 진상, 즉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는 사실이 천하에 밝혀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교활하고도 집요한 음모와 압력 때문에 이 재심마저 놀랍게도 다시 유죄가 내려진다. 이를 본 프랑스 국민과 온 세계가 격분하게 되자 군부는 타협책으로 ‘특별사면’이라는 형식으로 드레퓌스를 석방한다. 드레퓌스는 그 뒤로도 재심 요구파의 끈질긴 투쟁 끝에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드레퓌스를 유죄로 할 어떠한 증거도 없으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유죄판결이 무효라고 판시하며 한 유태인 장교의 의혹 사건에서 비롯되어 10여 년 동안이나 프랑스를 파란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던 정치적 열병은 마침내 진실을 수호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쳤던 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드레퓌스는 구속된 지 약 12년 만에야 완전한 복권을 하게 된다. 한 시대를 소용돌이치게 만든 이 거대한 드라마가 궁극적으로는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세력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드레퓌스 사건이 안겨주는 또 하나의 감격이라 하겠다. 특히 편협한 국가이익을 넘어 진실과 정의라는 보편 이성에 귀 기울이라는 졸라의 외침은 단순히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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