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⑰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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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거창의 근대 전환기 100년사 ⑰ 1920년대 거창의 민족교육 운동
  • 한들신문
  • 승인 2021.11.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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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 4년제 농업학교가 생기다

일제강점기 거창지역에는 중등학교가 없어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진학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거창에서도 중등학교 설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8년 3월 거창에서는 ‘거창농림보습학교기성준비회’가 조직되었다. 보습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조선의 간이중등실업학교로 주로 2~3년제로 구성되어 있었고, 농업보습학교의 경우에는 1년 이내로 수업연한을 단축할 수 있었다. 종류로는 관립, 공립, 사립 등의 농업, 상업, 공업 학교 등이 있었으며, 전체 보습학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학교는 농업보습학교로 약 70%가 있었다. 고등보통학교 5년제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2년제 학교였다. 고등보통학교는 오늘날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며 당시 줄여서 ‘고보’라고 불렀다. 이 시기 농림학교를 포함한 실업학교는 2년제였으며, 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한 사람들이 입학했다.

▲ 거창농업보습학교 설립기성회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1928)
▲ 거창농업보습학교 설립기성회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1928)

 

  그해 7월 23일 면장 회의를 기회로 하여 24일 거창의 유지들은 침류정에서 농업보습학교 설립에 대해서 논의한 후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기성회는 위원장 이현빈, 위원 유상범, 신용희, 신○재, 주남재, 윤기상 외 23명이었고 고문은 김성한(당시 거창군수), 이현보, 정태균(중추원 참의)이었다. 이들은 설립자금 23,000원을 각 면별로 분배하고 각 면의 책임자를 면장과 학교평의원으로 정하였다. 분배금은 거창면 7,000원, 가조면 3,200원, 웅양면 2,500원, 위천면 2,500원, 북상면 1,600원, 읍외면 1,000원, 마리면 1,000원, 남상면 1,000원, 신원면 750원, 가북면 750원, 주상면 600원, 남하면 600원, 고제면 500원이었다.
  1929년 5월 군에서는 학교비 6천 원, 지방비 보조금 3천원, 거창공립보통학교 장학회 기금 3천 원, 합계 1만 2천 원의 자금으로 경상남도에 거창농림보습학교 설립을 신청하였다. 거창농림보습학교는 1929년 8월 28일 도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9월에 침류정을 임시교실로 삼아 개교하였다. 11월 7일에는 공사비 6,990원으로 학교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다.
  1920년대 이후 실업학교의 수업 연한이 3~5년으로 연장되어 명목상 조선 내의 고등전문학교나 대학 예과에 진학하거나 일본의 중학교 5학년에 편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실업학교는 고등보통학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사립 실업학교의 인가도 크게 제한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지역민들은 농림보습학교는 2년제로 한계가 많으므로 정규 농림학교 설립운동에 나섰다. 1931년 경상남도평의회에서 거창중등학교 설치건이 건의되었고, 그 후에도 지역 인사들은 1935년까지 조선총독부에 학교 승격을 진정하였다.
  1937년 9월 군민 90여 명이 거창공립농업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약 7만 원의 기본금을 군민에게 호세 등급으로 조달하고 당국에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기성회의 위원장은 김병우, 부위원장은 김상길, 테라오 세이타로, 위원은 73명이었다.

  이후 거창농림학교 설치를 위한 주민 분담금과 기부금이 국내외 각지로부터 끊임없이 접수되었다. 1939년 월천면이 분담금 4,400원을 가장 먼저 완납하였다. 1939년부터 지역민과 지역 출신 각지 인사, 외지인들이 50전에서 수천 원에 이르기까지 기부금을 내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부금 납부자만 수십 명에 달한다. 심지어 일본 오사카, 다카오카에서 날품팔이하는 노동자들도 기부금을 보내왔고 만주에 있던 한 출향인은 1천5백 원을 기부하였다. 1943년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실업학교의 교육 연한이 4년으로 고정되었으며, 1944년 3월 31일 마침내 조선총독으로부터 4년제 거창공립농업학교가 인가되었다. 
  하지만 농업학교를 포함한 실업학교 출신자도 고등전문학교나 대학 예과에 진학할 수는 있었지만, 교과목 자체가 실용 기술 분야에 편중되어 있어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에 응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진학자도 극소수였다.
  이 학교는 해방 이후 거창농업중학교로 바뀌고 1951년 학제개편으로 거창중학교와 거창농림고등학교로 분리가 되었다. 
  거창농림고등학교는 거창종합고등학교와 거창산업과학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운영되다가 현재의 아림고등학교가 되었다. 

▲ 거창공립농업학교 설립기성회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1937)
▲ 거창공립농업학교 설립기성회를 보도한 당시의 신문(1937)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늦봄 조재원(문화 칼럼니스트)

※ 참고문헌
1. 신용균,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역사공간 (2015)
2. 조재원, 『거창의 지역사회 변동과 민족운동』 (2020) 
3.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 (encykorea.aks.ac.kr/)』 

※ 신문자료 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 「거창농업보습교 창립기성회를 조직」 (『동아일보』, 1928. 7. 28)
2. 「거창농업보습 설립기성 조직」 (『동아일보』, 1924. 3. 7)
3. 「거창실업교 설립 신청 재이」 (『동아일보』, 1929. 5. 17)
4. 「거창농보교 교사건축 착공」 (『동아일보』, 1929. 11. 18)
5. 「거창보습교를 을종 농업학교로」 (『조선일보』, 1931. 3. 10)
6. 「거창농업교 승격을 갈망」 (『동아일보』, 1928. 5. 10)
7. 「거창공농교 설립기성회 조직」 (『동아일보』, 1937. 6. 5)
8. 「거창공농 설립기성회를 보고」 (『동아일보』, 1937.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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