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솔숲에 부는 바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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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솔숲에 부는 바람 2
  • 한들신문
  • 승인 2021.11.3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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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소설가)
그림 : 박혜원
그림 : 박혜원

 

허난설헌은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5대째 문과에 급제한 안동 김 씨 문벌가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는 허난설헌보다 한 살 많았고,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 같다. 난설헌이 죽던 해, 그는 28세가 되어서야 병과에 급제했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렀다.
  하루는 김성립이 접(接: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파자(破字:한자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하여 맞추는 수수께끼)를 사용해, 오늘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았다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이는 김성립이 공부를 한다면서 평소에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허난설헌에겐 자녀가 있었는데, 딸을 먼저 잃고 그다음 해엔 아들을 잃었다. 그녀는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슬픔, 부부간의 불화와 고부간 갈등, 그리고 가부장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의 아픔을 창작으로 승화시켰다. 
  1589년 3월 19일, 그녀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집안사람들에게‘금년이 3·9수에 해당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로, 난설헌이 연꽃처럼 살다 간 세월과 같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자유분방하고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보낸 허난설헌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가족과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신분제의 모순을 고민하던 시인이자 진지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봉건사회는 그런 여성을 포용하기에는 옹색하고 남성 중심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난설헌은 요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돌담으로 쌓여 평온했고 세월이 만들어낸 마루의 그윽한 빛깔과 돌계단의 이끼가 평온함을 주었다. 돌담의 기와와 텃밭도 고즈넉함을 더했다. 햇살 가득한 마루 끝에 앉은 나는, 박완서의 단편소설 <참을 수 없는 비밀>의 하영이처럼 그곳 툇마루에 스르르 몸을 눕히고 깊고 평안한 잠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허난설헌이 느꼈을 고통과 꿈, 그리고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피워낸 작품의 혼령이 나의 뼛속 깊이 파고들길 바라는 비원(鄙願)이 너무 컸던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곳 허난설헌의 생가가 오래전부터 내 속에 둥지를 틀고 자리 잡아 왔던 것 같은 내경험(內經驗)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가를 다 둘러본 후에 밖으로 나와서도 나는 곧바로 그곳을 떠날 수 없어 한참 동안 주변을 서성거렸다. 생가를 감싸고 있는 솔숲 바람에 난설헌이 감내해야 했던 아름다운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아 나는 두 팔을 벌리고 그 바람을 가슴에 안았다. 바람은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어쩌면 난설헌이 가장 괴로웠던 그 시간에조차도, 어린 시절 집안 가득했던 따사로운 햇빛과 돌담을 타고 흘러드는 솔바람 향기에 대한 기억이, 그녀를 다시 일으키곤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그녀의 집을 뒤로하고 고샅을 빠져나왔다. 나에게도 이런 ‘자궁 같은 집’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허난설헌 생가에 가득한 이 바람을 담고 돌아가 나의 일상성을 감내하며 내 속으로부터 만들어낸 집을 짓는 일이, 그래서 그 누군가 오가다가 지쳐 나의 집에 잠시 머물러 위로받는 일이, 나의 일로 남아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지만 머물러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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