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1 "진마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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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마을역사연구회 마을역사 탐방 11 "진마루마을"
  • 한들신문
  • 승인 2019.12.1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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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루는 해발 600미터에 위치한다. 마을 앞 낮은 산을 청룡이라 하는데 청룡의 날등이 길어 마루띵이라 하였고 진말또는 진마루로 불리게 되었다. 순 우리말인 진마루는 일제강점기 한자로 장지로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20141월부터 도로명 주소가 시행되면서 장지로는 묘들이 모여 있는 장지(葬地)’와 동음이라 어감이 좋지 않아 옛 이름 진마루를 되찾게 되었다.

진마루에 가장 먼저 터를 잡았다는 창녕 성씨는 다래 넝쿨을 치고 마을에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이후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해 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상징인 느티나무 수령은 500년이 넘었으며 지금은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나무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면서 심은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마을역사 공부

일제강점기 마을에는 농민 서당이 있었다. 마을 분들은 야학, 농민 서당, 농민 도장, 농민 강습소라는 말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취학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농민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배웠다. 마을 어르신들 이야기로는 행정력이 미치는 농민 서당은 일본말을 교육했고, 한문은 몰래 가르쳤다고 한다. 진마루 농민 서당에서 이현복(연안 이 씨) 씨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마을 아이들은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1939년 웅양 제2 심상소학교가 문을 열어 입학하였다. 이들이 하성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다.

일찍이 마을에서 약초농사를 지었다. 약초를 보급한 분은 채오룡 어른이다. 오미자, 작약, 동귀, 백지, 하수오, 도라지, 더덕 등을 심어 약초 재배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0년대까지 마을 농사는 대부분 벼와 보리농사였으며 누에치기도 하였다. 그 후 벼농사와 함께 담배농사를 하였다. 하성농협에서 소득 증산을 위한 100만 주 식생 운동으로 집단 양잠업을 권장하여 한때는 마을 전체가 누에치기를 하였다. 1980년대에는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지어 하성농협을 통해 군납을 하였다. 1990년대 포도나무를 심었고 2000년부터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사과농사를 짓는 가구가 늘어났다. 고도가 높고 햇살이 좋아 진마루의 포도와 사과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상품이 되고 있다.

정자나무와 마을

너른 그늘을 가진 정자나무는 동네 놀이터였다. 백범술 씨(79)가 어렸을 때 오래된 느티나무는 속이 비어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나무 안을 들락날락하며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몇몇 개구쟁이들이 나무 안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삽시간에 나무 안에 불이 붙었다. 오래된 나무 안에서 난 불은 걷잡을 수 없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길어다 부었다. 아무리 부어도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논에서 흙을 파오고 돌을 주워서 나무의 구멍을 다 막으니 비로소 불이 꺼졌다. 그때 불을 끄기 위해 나무속에 넣은 돌이 한 경운기는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나무는 돌을 품은 채 살이 차올라 울퉁불퉁한 표면이 드러나 보인다.

 

진마루 저수지

진마루 저수지는 1966년에 착공하여 적화 주민들이 마을마다 날짜를 정하여 지게로 흙을 져다 나르며 1969년에 완공하였다. 당시 공사에서 일한 노임으로 받은 밀가루를 ‘480 양곡이라 하였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때인지라 저수지 공사에 가서 일을 하고 밀가루를 받아왔다고 하였다. 미국 공법(Public Law) 480호는 미국 농산물의 과잉 생산에 따른 가격 폭락을 막고 제3세계의 식량부족 문제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공된 원조 식량이었다.

그날 하루 나오면 하루 일당이 한 평, 그것을 한 대가리라고 하는데(중략) 한 평을 팔라카마 장골이 져야 서른 엿 짐, 약한 사람이 지면 사십 짐, 한 삼일을 해야 밀가루 한 포대를 줍니다.”

지게로 하루에 정해진 양을 채워야 하는데 한번 져 나를 때마다 전표를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저수지는 2000년도 매미와 루사가 왔을 때 마을을 구한 일등 공신이었다고 한다.

진마루길

1971년 마을 간이 상수도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 자재는 웅양면에서 제공하였고 마을 사람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석유곤로에 불을 피워 PVC 파이프를 녹여서 굽히는 등 봄에 시작한 상수도 공사는 꼬박 45일이 걸려서 마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 소를 몰아 골을 타고 감자를 심었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부역하러 나갔다. 리어카도 없던 시절이라 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고 지게로 짐을 져 날랐다.

상수도 공사가 끝나자마자 마을길 닦기 공사를 시작했다. 마을 한 분은 상수도 공사를 끝내고 동네 길을 닦다가 군대를 갔다고 하였다. 그가 휴가를 나왔을 때 중간까지 길이 나 있었고 제대를 하고 오니 동네가 완전히 바뀌었다. 집마다 리어카도 생기고 동네 길도 훤하게 닦여져 있었다고 하였다.

진마루 길은 도로에서 마을까지 1.5킬로미터, 비가 오고 난 다음은 진흙투성이 길이었다. 지금은 넓게 포장되어 있어 자동차로 약 5분 정도 걸린다. 우리가 편하게 이용하는 이 길은 50년 전 자고 일어나면 마을길 닦기에 나섰던 사람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진마루의 상징, 느티나무

진마루는 귀촌, 귀향하는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진마루로 귀촌한 목사님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목사님은 두 가지만 자랑하고 싶다고 하셨다. 첫째는 마을의 햇빛이고 둘째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라고 하였다. 귀촌하기 위해 여러 마을을 다녔는데 이곳은 정말 햇볕이 좋다고 했다. 농사가 잘되는 것은 해발도 높지만 햇볕의 영향이 더 결정적인 것 같다고 하였다. 마을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어 적응하고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고 주민회의에 참석하였는데 한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는 게 아니라 누구나 발언하고 의견을 듣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진마루 정자나무는 마을의 상징이라고 하였다. 여름날 정자나무 그늘에서 앉으면 탁 트인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과 햇볕, 사는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이 있는 곳, 진마루는 누구나 들어와 살고 싶어 하는 마을이라고 자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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