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 인생의 방부제】‘빛의 과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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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인생의 방부제】‘빛의 과거’를 읽고
  • 한들신문
  • 승인 2020.03.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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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전미정

은희경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이중주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대표작은 늑대와 춤을’, ‘중국식 룰렛’,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등이 있다.

30대 초반에 읽었던 그녀의 장편소설 새의 선물은 나에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과 소설을 편애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야무진 문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숙한 십 대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가 냉소적이지만 따뜻한 유머로 그려져 있어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포복절도할 수도 있구나를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이 소설 또한 다르지 않다.

1977년 서울 어느 여자대학 기숙사의 사생들이 펼치는 개개인의 다름섞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국에서 상경한 갓 스물이 된 여학생들의 세상과 서투른 만남. 낯섦으로 말더듬이의 증상이 더 심해져 더욱 움츠러들고 방어적인 자세로 세상을 읽어나가는 유희경 시점의 이야기와 그 속에 액자 소설로 들어가 있는 화자와 대립하는 인물 김희진의 이야기가 두 개의 축이 되어 소설이 진행된다. 중년이 된 두 사람의 시점에서 대학 신입 시절 겪었던 똑같은 상황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편집되고 수렴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인물들을 겪지만, 자신의 약점이라는 예민한 레이더로 읽는 세상은 제각각 다르게 해석된다.

군부독재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폭압적인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여성들은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교련 연습과 소지품 검사라는 사적 영역에 대한 침입이 버젓이 벌어지는 고교 시절을 벗어나 자유와 학문을 상징하는 상아탑의 대학에 들어왔지만 경직되고 감시 감독하는 체제는 별반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유지된다. 기숙사의 사감과 부사감이라는 감시인과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모종의 이득을 취하는 학생이 4인으로 이루어진 기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형태로 그들을 통제한다. 미팅을 통해 만나는 이성과 은밀한 감정 변화 그리고 엇갈린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리적인 갈등들을 통해서 각자가 받아들이는 오해와 삶의 진실들은 너무 다르게 각인된다.

여러 명의 사생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과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은희경 특유의 위트와 유머가 깃든 날렵한 언어 감각으로 책을 읽는 내내 폭소를 터트리게 한다. 그렇게 웃고 있으면 이렇게 암울한 시대의 폭력과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표현한 문장인데도 나는 웃고 있구나하는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는 없다.

인물마다 깃든 내면의 불안과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성격이나 나약한 면모와 흑역사이어서 감추고 싶었던 수치심 등을 조각조각 내어 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일 수 있을 것이다. 즉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욕망, 비겁함, 이기심, 후지고 졸렬한 모습, 숨기고 싶은 상처들 속에 나란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은 책을 읽는 순간일 것이다. 발가벗겨진 자신을 책 속의 인물을 통해서 만나게 되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내 부끄럽고 파란 시절의 어눌함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빛이 될 수가 있었다.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는 잘 나가는 성공한 인물이든, 풍문으로만 들려오는 숨겨진 개인으로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든, 내 삶에서 나는 하나의 빛이다. 그 빛에 걸맞은 한 존재로 자신만의 심리적인 사생활을 잘 가꾸고 자신만의 영토를 잘 갈무리한다면 외부적 힘에 휘둘리지 않는 고요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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